제목 | [구약] 아가: 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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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6 | 조회수5,809 | 추천수1 | |
[김혜윤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아가 (7-17) : 내용 (1-11)
구원과 사랑 실현위해서는 갈망 열정 고통의 벽 넘어야
너무 노골적인 사랑묘사에 지레 겁을 먹고, 성서에 별 희한한 내용도 다 있네, 하는 불편함으로 아가를 처음 대했을 때도, 그 이상하기만 하던 이야기가 왠지 새롭게 다가와 다시 꺼내 읽었을 때도, 그리고 지금 원고를 준비하며 또 다시 읽으면서도, 아가를 읽을때마다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고통스러움」이다.
이상하기도 하지. 사랑을 노래한 아름다운 글이 왜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며칠을 고심하다 마주한 대답은, 사랑과 구원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의 지독한 열망, 열정, 그리고 고통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각자 안에 구원과 사랑이 충만히 실현되기까지, 인간 내부에 혼재하는 갈망과 열정, 고독을 수용하는 과정은 사무치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그리움과 슬픔이라는 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결코 쉽지 않은 삶의 조건이며 현실인 것이다.
아가의 주제는, 그러므로,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을 찾기까지의 혹독한 「열망」과 「방황」, 「아픔」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만날 수 없고, 그래서 말을 건넬 수도 없는, 내 삶과 운명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바로 그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이야말로, 아가가 제시하고자 한, 인간실존의 현주소이며, 구원과 연관된 신학적 주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가의 여주인공과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무언가를 찾고 갈구하며, 매일 포기하고 다시 일어나 희망을 품어본다는 점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녀의 고통은 우리에게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절대자 하느님이건,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그 사람」 혹은 「그 것」이건, 웬만해서는 내 앞에 잘 나타나주지 않는 바로 그 존재를 만나 내 사랑을 소통하기까지, 그리하여 구원이라는 최종 결과에 이르기까지, 인간 실존은 부재, 찾음, 방황, 체념이라는 벽을 정직하게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주부터 우리는 아가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게 될 것이다. 되도록 제시된 구절의 성서를 읽으면서 따라와 준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 같다.
1, 1~4(서곡)
처음에 등장하는 표제 「솔로몬의 노래들 중의 노래」에 대하여는 이미 충분히 설명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해설을 생략하기로 한다. 솔로몬 저작에 대한 논쟁과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표현이 히브리어의 최상급 표현이라는 점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가는 그 서곡부터 여주인공의 주도적 역할이 강조되어 있다.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맞추어 주었으면!』(2절)이라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강렬한 표현에 담아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번역(새 번역과 공동번역)에는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실제 히브리어 문장은 「입 맞추다」라는 동사의 어근(나샤크, nasaq)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필자 직역: 『그의 입술의 입맞춤으로 나에게 입맞춤해 주었으면』), 그리움(입맞춤)에 대한 최상급적 표현을 시도하고 있다.
2절은,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를 적용하고 있는 3~4절과는 달리, 「그」(3인칭)로 연인을 지칭하고 있어서, 3절 이하와의 작은 문학적 균열을 드러낸다.
3절은 특별히 연인의 「향기」와 그의 「이름」이 가지는 강력한 능력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사랑의 시에서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더욱이 이 두 명사는 비슷한 히브리어 자음과 발음을 가지고 있어서(「향기」- 쉐멘, 「이름」-쉠), 시의 음성적 진가와 리듬을 살려주고 있다.
결국 저자는 「이름」과 「향기」를 상응시킴으로써, 사랑하는 이의 「이름」(히브리 어법에서 이름은 호칭의 기능보다 존재론적 가치를 의미한다)은 그 자체로 「향기」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임금』으로 연인을 제시한 표현(4절) 역시, 고대 근동 연애시에서 쉽게 발견되는 표현인데(1, 12; 7, 6 참조), 사랑의 관계에서 연인이 차지하게 되는 절대적 우위성과 권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4절의 3행은 1행의 「우리」(여인과 그녀의 연인)와 구별되는 또 다른 「우리」가 등장하는데, 새롭게 등장한 이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본문은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익명성」 역시 아가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1, 8; 2, 15; 3, 3.5.6; 5, 2.3; 6, 10; 8, 4.5.8~9.14 등), 문장과 문맥에 의지해서 그 정체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1, 5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이 이 「우리」에 해당되며, 여주인공의 입장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녀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는 친구들로 보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특별히 이들은 아가서 내내 「합창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가톨릭신문, 2004년 10월 1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바른 가치관으로 살아갈 때 소중한 삶의 여정 완성돼
『만일 그대가 모르고 있다면…』(아가 1, 8).
오늘 살펴볼 아가의 첫째 노래, 전반부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이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건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는 당신, 그래도 결코 절망할 필요는 없다. 생텍쥐베리 식으로 말한다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그러니 모르는 것이 당연한 셈이니까….
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도달하는 길을 「모르고」 있는 여주인공에게, 그를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내용으로 첫번째 노래를 시작한다.
1, 5~2, 7(첫번째 노래)
서곡에 이어 첫째 노래가 이어진다. 이 부분은 다시 전반부(1, 5~8)와 후반부(1, 9~2, 6), 그리고 결어(2, 7)로 구분되는데, 처녀는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에게 연인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물어보고, 그를 찾아 용감하게 길을 나선다. 후반부인 1, 9~2, 6은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이 사랑을 깨우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애원으로 노래는 마무리된다(2, 7).
1) 전반부(1, 5~8)
전반부는 처녀가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특징 중에 제일 먼저 「피부색」에 대하여 말을 건넨다. 『나 비록 가뭇하지만 어여쁘답니다 / 케달의 천막처럼 / 솔로몬의 휘장처럼』. 여기서 제시된 「케달의 천막」과 「솔로몬의 휘장」은 여주인공의 아름다움이 「민중의 전통」과 「왕실의 전통」을 함께 어우른 것임을 암시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민중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던 「케달의 천막」과 왕실의 화려함을 상징하던 「솔로몬의 휘장」에 직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E. Boetti 등)은 이러한 표현을 이스라엘 스스로가 가졌던 「자기이해」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그저 평범한 유목민의 후손이었지만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측면에서 귀족의 품위를 지니고 있음을 상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그녀는 자신이 검게 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하는데(6절), 오빠들이 포도원을 지키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서 전통에서 「포도밭」은 여성의 몸을 표상하기도 하고, 이스라엘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이사 5, 1~2; 시편 80, 8~16 등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포도밭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고백은 하느님이 주신 유산을 지킬줄 몰랐던 이스라엘의 통한과 후회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너희』를 대상으로 진행되던 여주인공의 대사는, 7절부터 『당신』으로 바뀐다. 사랑하는 그녀의 연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한 직접화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 자기 마음 안에 존재하는 그녀의 『당신』에게 직접 말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여, 내게 알려주세요. 당신이 어디에서 양을 치고 계시는지』(7절).
즉 그녀는 그가 다니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한낮의 더위를 피해 쉬는 곳은 어디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이는 그녀가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날 준비를 다했음을 표현하며, 이러한 태도는 위험한 여정을 무릅쓰겠다는 각오일 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도전해서라도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그녀의 강인한 다짐의 표출이다.
고대사회가 일반적으로 가졌던 특징이지만, 여성 혼자 길을 떠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안전한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주인공의 염원과 갈망을 이해하는 친구들은 8절에서 연인을 만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사랑하는 이의 길을 따라 나서라는 것이다. 그의 흔적을 따라가는 것, 사랑을 만나서 그 사랑을 살기위해 우선적으로 꼭 필요한 조건이다.
발자국을 따라가다
이 원고를 쓰면서 사랑은, 「뒤를 밟게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미행의 끝에서, 여태 말해보지 못한 사랑을 소통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아니야』라는 무섭게 아픈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슴을 조각내는 슬픔을 마주하게 될지라도, 나를 따라오게 한 그 흔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그런게 사랑, 아닐까….
우린 누구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마음에 품고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제껏 그 가치(사랑)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온 것이고, 앞으로도 더 먼 길을 가야할지도 모른다. 그 가치가 제시한 진리로 의식을 무장하고, 그 흔적이 사랑한 이들을 나도 사랑하며 살아갈 때, 그 소중한 사랑을 닮은 내 삶의 여정은 완성되는 것이리라.
부부가 서로 닮아간다는 말, 그리고 사제들을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유, 이제 좀 알 것 같다. [가톨릭신문, 2004년 10월 24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가슴앓이와 고통 극복은 성숙한 사랑위한 우선조건
오래전에 본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은 여러모로 감탄스러운 영화였다. 무엇보다 여 주인공이 보여주던 「촌스러움」이 기억에 남는데, 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고무신, 동생을 업을때 사용했던 때묻은 포대기, 그리고 꽃가라 블라우스…. 그런게 소품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 이야기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촌스러워도 마음 안에 진심을 담고 있으면, 그 순간 인간은 완벽한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으니 말이다. 사랑은 인간의 진정한 현재적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번 주에 살펴볼 아가의 첫째 시 후반부에서는 두 연인의 「아름다움」이 각별히 강조되어 있다. 사랑의 미학이란, 자신의 추함을 극복하고, 각자 안에 숨겨져 있는 창조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그것을 소중히 살게 하는 그런 충만함이 아닐까한다.
첫번째 시의 후반부(1, 9~2, 7)
후반부의 앞부분(1, 9~17)은 매우 조직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비슷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남자와 여자의 노래가 서로 듀엣(Duet)처럼 교차되기 때문이다: A) 남자(9~11절) -> B) 여자(12~14절) -> A') 남자(15절) -> B') 여자(16~17절).
먼저 노래를 시작하는 이는 남자이다. 사랑에 빠져 거친 들판을 헤매던 처녀를 알아본 사람은,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연인이었다. 자신을 찾아 먼길을 떠나온 그녀를 발견한 남자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파라오의 준마』(1, 9)에 비유한다(9~11절). 「말」이 상징하는 대담함, 힘, 자유가 「파라오」라는 귀족적 아우라를 통해, 왕후의 우아함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는 10~11절에도 계속되며, 12~14에서는 여인의 노래가 시작된다.
이 부분의 모티브는 「향기」이다. 고대사회에서 여인들은 향료주머니를 몸에 지니거나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하는데, 여주인공은 자기의 연인이야말로 목에 걸려 있는 살아있는 「향기」임을 강조한다.
15~17절은 다시 남자-여자의 듀엣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강조된 단어는 「아름다움」이다. 서로를 아름답다고 칭송하며 사용된 이 히브리어 「야페」는, 짧은 문장안에 3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2장에서부터 두 연인은, 서로를 많은 군중 사이에서도 알아본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다. 남자는 여주인공을 『아가씨들(가시덤불) 사이의 백합꽃』이라고 구별해내고, 여자는 상대를 『젊은이들(숲속의 나무들) 사이의 사과나무』라고 표현한다. 사랑의 대상인 바로 「너」 말고는 그 어떤 가치도 아름다움과 특별함의 대상일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아가 2, 3b부터는 조금 긴 여주인공의 노래가 이어진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랑하는 이를 「그」(3인칭)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여인은 『그이(사과나무)의 그늘』에 앉기를 갈망하며, 『그이의 열매』를 먹기를 희망한다(3b절). 강렬한 햇빛과 전형적 목축-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팔레스틴의 문학작품에서, 일반적으로 「그늘」은 보호와 평안을 의미하며, 열매는 삶의 절대적 조건을 상징한다. 이어 그녀는 자신의 위에 걸린 깃발의 이름은 「사랑」임을 선포한다(4절). 여인은, 자신에게 꽂힌 「사랑」의 깃발 때문에 몸에 병이 났다. 그녀의 병명은 사랑(5절)! 「상사병」은 고대 근동의 연가에서나 한국의 민담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 그런데 일반적 연가와 아가를 차별화 시키는 모티브는 그 병을 앓고 고백하는 화자이다. 이러한 적극적 고백은 대개 남자들의 전용멘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가는 이 병을 여성 스스로 고백하게 한다(2, 5; 5, 8). 다행스럽게도 아픈 그녀를 치유시켜준 존재는 그녀의 연인이었다. 아픈 여주인공을 안아주는 포옹을 통해 그녀의 사랑은 보상 받는다(6절). 7절에서는 다시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작은 균열이 제시되며, 여인은 결국 「사랑」을 보호하려는 염원으로 노래를 마무리한다.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줘요.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7절). 이 구절은 3, 5과 8, 4에도 후렴처럼 반복되는 것으로서, 그만큼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여인은 사랑이 인위적인 힘이나 가공적 조건에 의해 방해받거나, 혹은 커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사랑은 사랑 자체가 그 끝을 알고 결정함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삶의 감각이 생겨날 때까지
익숙한 얘기지만, 성숙이라는 자질은 「가슴앓이」를 통해서만 내 것이 된다. 20대의 미숙함이 주었던 아픔 때문에 30대에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되며, 30대의 슬픔과 아픔을 통해 40대는 좀 더 따뜻함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마음에 큰 깃발을 꽂았을 때 그 아픔은 치유할 도리가 없다. 고스란히 그 속병을 감수하는 수밖에.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중하고 예민한 감각이 내 안에서 완전히 촉발될 때 까지…. [가톨릭신문, 2004년 10월 3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상실감에 빠지지 않으려면 삶의 중심이 하느님이어야
누군가는 죽음을 「기억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멋진 말로 정의해주었다. 「기억」이 소중한 이유는, 그러므로, 기억속의 그 사건과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녹아있는 나 자신의 존재감과 그 관계에 대한 구체적 확인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에 살펴볼 아가의 둘째 노래는 사랑의 추억을 기억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기억은, 현재적 실존을 감당할 수 있는 힘임을,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게 하는 구체적 동인임을 잘 가르쳐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 다가올 그 시대를 감당할 수 있게 할 「기억」이 될 것임을 「기억」하는 것, 「현재」가 가지는 가장 유효한 가치이며 의미는 아닐는지.
2, 8~17(두번째 시)
둘째 시는 지난 봄, 자신을 찾아왔던 연인을 회상하는 여주인공의 노래로 시작된다.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전체적으로 감미롭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초반에 등장하는 「산, 노루, 젊은 사슴」(8~9절) 모티브는 마지막 구절인 17절에 다시 반복됨으로써, 전체적인 틀(인클루시오, inclusio)을 형성하고 있고, 시간적 배경을 아침-낮으로 설정하고 있어서, 밤 이야기가 시작되는 3, 1이하(세번째 시)와 뚜렷이 구분된다.
노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8a절). 여인은 그 목소리가 사랑하는 연인의 소리임을 즉시 깨닫는다. 자신을 찾아오는 연인을, 산과 언덕을 「뛰어넘는 노루와 젊은 사슴」으로 표현한데 이어, 9절 b에서는 「담벼락과 창문 뒤에서 기웃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힘차게 달려온 노루가, 담벼락 뒤에서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는 설정인데, 동적인 성향과 정적인 모습을 결부시킴으로써, 활기차고 날렵하지만 동시에 무례하지 않는 연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10절 b에서 남자는 직접 화법으로 말을 건넨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주오』.
이 표현은 13절에 다시 반복되고 있는데, 물론, 이 말은 남자가 직접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여자가 기억하고 있는, 혹은 환상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이해할 수 있겠다. 11~13절에 등장하는 봄에 대한 묘사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자연관련 묘사 중 가장 아름다운 본문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마치 슬라이드를 보듯이 풍경화를 연달아 보는 듯한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초반부에서 「젊은 사슴」으로 묘사되었던 남자는 이제 자신의 여인을 『바위틈에 있는 비둘기』로 표현한다. 전통적으로 비둘기는 평화와 온유를 상징하고, 동시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제비가 날아오면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듯이, 팔레스티나에서는 비둘기를 통해 봄이 왔음을 인식했던 것인데, 연인은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음을 상기시키면서, 「바위 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그녀(비둘기)에게 어서 나올 것을 촉구한다. 그들의 사랑이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5절에는 갑자기 「작은 여우」들이 등장하여 포도원을 망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이 표상은 포도원이 상징하는 것(여성의 몸 혹은 그들의 사랑)과 그것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것(여우)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다.
16절에 등장하는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이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서로의 사랑을 교환하는데 사용된 고유 표현이다(6, 3; 7, 11). 이 표현은 주로 혼인 계약시에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구약성서 전통 안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를 선포하는데 적용되었다.
『주님께서 너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는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될 것이다』(신명 26, 17~18)가 그 대표적 구절이다. 둘째 시는 연인을 다시 「베델산」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17절). 이 산이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실제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징적인 산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모호성은 아가가 노래하는 모든 내용이 꿈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다분히 몽환적 상태의 것임을 밝히고 있다.
기억과 삶
아가의 여인은 연인을 실제적으로 만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본다. 그를 기억하고 있기에, 그녀 안에 그가 완벽하게 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이 예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억」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을 듣고 있다. 상실감으로 삶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면, 삶에 지쳐 생이 바닥나는 혼란에 다시는 빠져들고 싶지 않다면, 방법은 하나 뿐. 언제 어디서고 그분을 기억할 것, 그리하여 내 삶의 질서가 그분이게 할 것. 사소하고 평범한 내 일상이지만, 간절함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 분은, 그분뿐이시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자신을 극복하고 넘어설때 진정한 사랑의 기쁨 체험
동화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부터 「신비」는 언제나 내게 최대의 매혹이었다. 별로 신비로울게 없는 평범한 운명과 삶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여간 어른이 된 이후에도, 그림책이나 사진첩 중,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이내 완독해버리지 않고는 못배긴다.
신비…. 「비밀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라는 정의를 생각해본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주변에 대하여 별 관심을 느끼지 못하는, 그저 적막하기만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건, 아마 비밀이 너무 없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제밤에 끓여먹은 라면이 컵라면인지 사발면인지, 그저께 사온 아이스크림을 얼마만큼 먹었는지를 모두 알고 있는 사이라면, 당연히 비밀 같은게 있을리 없고, 그러니 「신비로움」이라는 오묘한 질서는 도무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는 자체적으로 「신비」를 속성으로 하고 있다.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완벽에 이를 수 없는 학문이 신학이요, 신 존재에 대한 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심연과 신비 때문에 종교는 바닥을 드러내는 법이 결코 없다. 숲도,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숲과 바다가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 어두움과 심연에 가려져 있는 비밀 때문이 아니던가.
이번 주에 살펴볼 아가의 세번째 시는, 아무리 찾아다녀도 만나지 못하는, 그래서 철저히 자신의 존재를 비밀에 붙이는 사랑의 신비를 그리고 있다. 여주인공은 연인을 찾아 현실과 꿈을 헤매지만 어디에서도 그를 만나지 못한다. 그는 늘 그녀 안에 살아있어 함께이지만, 실제로는 만나지 못하기에 철저히 부재하는 것이다. 그런 역설과 모순 때문에 고독과 고통이 시작되고, 동시에, 그 고통스런 관계를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신비」는 사랑을 지속시킨다. 이렇게, 현존과 부재의 딜레마는 사랑의 중심에 서있는 원리이며, 또한 모든 사랑의 원형인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작용되는 비밀, 곧 신비인 것이다.
세번째 시(3, 1~5, 1)
아가의 「세번째 시」는 여러 장면들의 결합으로 되어있는, 긴 분량의 노래이다. 밤 장면(3, 1~5) -> 솔로몬의 결혼식(3, 6~11) -> 여자의 몸에 대한 찬가(4, 1~7) -> 레바논으로(4, 8~15) -> 사랑의 정원에서(4, 16~5, 1)가 그 대략적 내용이다.
밤 장면(3, 1~5)
3, 1~5는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밤 이야기는 5, 2~6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특히 이 두 본문은 「찾음」-「잃음」 / 「존재」-「부재」라는 상반된 모티브를 교차시키는 형태로 되어있다.
3, 1~5은 특별히 『찾다』(히브리어, 바카쉬)-『발견하다』(마짜)-『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여』(쉐아하바 납쉬)를 정확히 4번 등장시킴으로써, 그 체계적 구성을 보여준다.
노래를 시작하는 이는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밤새도록 연인을 찾았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고백한다(3, 1.2; 5, 6). 「현존」-「부재」의 문제는 모든 연애시에 절대적으로 등장하는 소재이며, 또한 교회전통의 유명한 신비가들이 거듭 사용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신비가들은 「영혼의 밤」이라는 주제로 이를 설명해왔는데, 이들에 의하면 모든 사랑 안에는 「자체적 밤」이 있기 마련이다.
고독과 방황, 혼란과 극적인 부재의 밤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체험하게 하지만, 좀 더 깊은 진리와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은총의 장이된다. 아가에서 특별한 점은 이러한 고독과 고통의 고백이 언제나 여주인공의 몫이라는 점이다.
연인을 찾기 위해 어두운 성읍의 거리와 광장을 돌아다니는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2절)라고 다짐하지만, 그녀가 만난 이들은 도시의 야경꾼들뿐이었다(3절).
그러나 인간이 모든 노력을 접는 순간에 기적은 일어난다. 돌연히 자기 앞에 서있는 연인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4절). 이어 여인은 연인을 자기 어머니의 침실로 인도하는데, 여기서도 여인의 적극적인 태도가 부각되어있다. 전통적으로 어머니의 침실로 신부를 인도하는 이는 신랑이기 때문이다(창세 24, 67 참조).
침실로 인도된 연인들의 이야기는, 5절에서 갑자기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에게 사랑을 방해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된다(2, 7 참조).
생명을 낳게 하는 사랑
아가의 연인들은 이제 어머니의 침실로 들어갔다. 사랑은 생명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고, 그 과정을 통해, 부모들 역시 자신을 거듭 낳게 된다. 굳이 결혼한 관계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인간은 사랑을 통해 자신의 한 시절을 넘기게 되며, 새로운 눈과 의식으로 거듭나게 된다.
자신을 넘어서지 않으면 절대로 타자에게 도달할 수 없는 것, 그 값진 극복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14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주자
모든 사랑과 삶은 이미 그 자체에 「권력게임」적 요소를 담고 있다. 사랑도, 삶도, 선택의 기회 없이 무작위로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이미 권위적이요, 복음서가 말하는 완벽한 사랑, 즉 타자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깊은 사랑은, 철저히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이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어서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운명도, 사랑도 아니기에, 상대측의 오만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기에서 돌아서지 못한다. 우리 어머니들이, 견디기 힘든 가부장적 전통과 고부간의 숨막히는 긴장을 견딜 수 있던 것은, 비범하고 때로는 불가해하기만한 자식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사랑한 사람은 덜 사랑한 사람의 폭력과 예의없음을, 그리고 그걸 바보같이 견디고 있는 누추한 자신을 수용하는 능력까지도 소유하게 되는 것일까. 그녀들의 주름 속에, 긴 세월 쌓아온 복합적인 감정의 흔적과 섬뜩할 정도로 강한 사랑의 잔해를 느끼게 되는 것은, 나 역시 부모님의 희생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면서 나만의 행복을 추구해온 철부지 시절을 지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살펴볼 아가서 부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솔로몬」으로 상징하고 있다. 사랑하고 있다면 누구나 그 어떤 힘도 범접치 못할 권위와 호사스러움, 그리고 밉지 않은 오만함과 권력을 소유하게 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솔로몬의 결혼식(3, 6~11)
밤거리를 찾아 헤매던 여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무대는 솔로몬의 결혼식 장면으로 이동된다. 갑작스런 전환과 누가 화자인지 분명하지 않은 히브리 본문, 더욱이 지금까지 적용되어왔던 「대화」(듀엣)양식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장면과 이전 본문들 사이의 뚜렷한 단절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솔로몬의 결혼과 아가의 두 연인이 가지는 연관성인데,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솔로몬과 그의 신부가 가장 호사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샬롬」(shalom)에서 파생하였다. 아마도 이 이름이 3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7, 9, 11절), 그것이 제시하는 「평화」-「지혜」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함인 듯하다.
결국 「솔로몬」의 등장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모두 솔로몬처럼 평화와 지혜를 소유하게 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무리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솔로몬 임금에 견줄 만큼 호사스럽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몸에 대한 찬가(4, 1~7)
4, 1에서는 지금까지 묘사된 결혼식 장면이 사라지고, 솔로몬이라 불리는 신랑이 자기 신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내용이 전개된다. 여인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찬가는 아랍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전통에서 항구하게 등장하는 요소이며, 특별히 아가는 근동의 연애시 전승에 자신들의 셈족 사고와 유목 환경, 그리고 솔로몬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통합함으로써 그들만의 고유한 노래를 만들어내었다.
신체적 조건에 대한 심미적 표현은 그녀의 품성과 인간됨, 정신적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으로 마무리되는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흠이 하나도 없다』는 표현(7절)은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찬사이다.
이는 창세기의 언급과도 연결된다. 보기에 『참 좋은』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함은, 역으로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 것이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고 말해주기
한국 남성들이 자기 내면 표현에 약하다는 점은 이미 자타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건조한 감수성 때문일까, 아니면 연습부족 때문일까.
충분히 아름다운데도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설사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말해주는 법이 없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어느 순간 철저히 이기적이고 무심한 표정으로 돌변하는 그 낯선 얼굴에는 어느 누구도 적응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솔로몬이 그의 신부에게 바친 최상의 찬미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 오십분의 일만이라도 표현해준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혹은 어머니에게 용기를 내어 당신이 정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그건 그분들께는 평생동안 결코 잊지 못할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이런 사소한 행복과 사랑을 실천하시는 남성이라면, 저 역시 대한민국 여성의 한 사람으로 당신께 엄지를 치켜 드립니다. [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2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잊고 있었던 추억과의 재회, 나의 현재와 존재감 조명해
행복의 실체를 보고 싶은가? 그러려면 「문」을 열어야 한다. 『눈은 감옥』이라는 말이 있듯이, 문 안만을 보고 있을 때, 그 문 밖에 서있는 구원의 실체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도, 사랑도, 하느님도, 언제나 줄곧 내 마음의 문밖에 서성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때, 어긋난 삶은 비로소 가볍게 풀릴 수 있다. 세번째 노래의 후반부와, 찾아온 연인을 향해 문을 열어주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네번째 노래를 함께 읽어보기로 한다.
레바논으로(4, 8~15)
여기에서는 「레바논」이라는 새로운 모티브가 도입되고 있는데, 처음과 중간, 마지막에 등장함으로써 단락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8.11.15절).
레바논은 팔레스티나 지역 최북단에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경관과 헤르몬산으로 유명하다.
이 신비의 땅이 아가의 여주인공에게 비유되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움을 표현해준다.
또한, 자신의 신부를 『누이』라고 부르는 것이 눈에 띄는데(4, 9.10.12; 5, 1), 이렇게 연인을 「누이」 혹은 「오라버니」로 부르는 관습은 고대 이집트의 연가에서 자주 발견된다.
12~15절은 이제 여인을 「정원」과 「샘」으로 표현한다. 근동지역의 척박한 기후를 염두에 둔다면, 정원과 샘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파라다이스적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랑하는 연인끼리는 서로가 생명과 구원의 장소가 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정원에서(4, 16~5, 1)
이제 노래를 부르는 주체는 다시 여인이다. 그녀는 자기 몸에서 향기로운 바람을 일으켜, 연인을 자신의 정원으로 초대하고자 한다(16절).
연인이 도착하고, 몰약, 발삼, 꿀, 젖, 포도주에 취한다는 표현(5, 1)은 이제 두 사람이 온전히 결합했음을 표현한다. 주변 사람 모두 「사랑에 취하라」는 권고로, 세번째 노래는 마무리된다.
5, 2~6, 3(네번째 시)
네번째 노래는, 연인을 찾아 밤거리를 헤매던 아가 3, 1~5과 매우 유사한 분위기로 시작된다.
밤늦은 시간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연인에게 여자는 문을 열어주지만(5절), 어찌된 일인지 그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이렇게 해서 다시 시작된 이별은(6절) 여인의 새로운 방황과 고통을 예고한다.
그녀는 밤거리를 찾아 헤매지만, 이번에는 연인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구타까지 당한다(7절).
이 때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이 등장하고(9절), 여인은 그들에게 연인에게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2, 5참조).
야경꾼들의 폭행으로 고통스러운 그녀는 그 아픔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애처로운 애원에 아가씨들은 연인의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사로잡았는지를 묻는다(9절). 그 답변으로 여인은 자기 연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5, 9~16).
아름다운 남성에 대한 찬사는 성서전통에도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주제로서, 요셉(창세 39, 6), 다윗(1사무 16, 18), 압살롬(2사무 14, 25) 등이 출중한 용모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이의 모든 것이 멋지다』고 얘기하는 여인(16절)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이해한 친구들은 이제 그를 찾아 나설 것에 동의한다.
그런데, 6, 2~3은 또 다른 내용상의 균열을 드러낸다. 지금껏 연인을 찾아 헤맨 여인이, 남자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정원」에 있다는 것인데(5, 1 참조), 연인의 근황에 대한 앎은 그녀가 사랑을 다시 찾았음을 암시한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음의 정원
어느 공간에 들어가면 유독, 그 공간을 규정지어 주는 향기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내게는 유학시절 학교 도서관이 그런 곳이었다.
서향(書香)이 강한 그곳…. 고서일수록 높은 층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층계를 오를수록 정신을 잃을 만큼 강한 향기에 취하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향기만으로도 학문의 존재감을 느꼈던 것일까….
아가의 여인은 자신의 향기로운 바람을 일으켜 연인을 부르고(4, 16), 이제 그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정원(자기 자신)에 찾아와 있음을 깨닫는다(6, 2~3).
각자의 마음 안에서 향기로운 바람 불러일으키며 존재하는, 그 무엇을 한번쯤 기억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계절이다.
초겨울이지 않는가. 그 추억과 조용히 재회할 때, 잊고 있었던 과거와도 조우할 수 있고, 그런 조우를 통해 나의 현재와 존재감을 다시금 조명해 볼 수도 있을 테니. [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28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간에 갈등과 긴장통해 성숙해져
이번주에 살펴볼 아가 본문은 여주인공을 「슐람미트」, 즉 「평화의 여인」이라 부르고 있다. 동의하기 힘든 표현이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아가의 사랑 역시 결코 행복하거나 평안하기만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밤길을 찾아 나서게 하는 위험한 사랑이었고(3, 1~4), 연인을 겨우 찾게 되면 이내 언덕과 산으로 달아나는 약오르는 사랑이었으며(2, 8~9), 그를 향해 문을 열고나면 이내 사라지고 마는 부재의 사랑(5, 6)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는 그녀를 「평화의 여인」으로 지칭한다. 진정한 평화는 극도의 혼란과, 거의 반란에 가까운 자기부정을 통과할 때에야 비로소 진짜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까. 그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관계를 맺게 되면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과 긴장이야 말로 그 관계를 진정하고 성숙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될 때, 삶에 대한 진중한 자세와 성숙도 가능해질 것이다. 「평화의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럼, 과정이 주는 고통에 정직하라.
6, 4~8, 4(다섯번째 시)
다섯번째 시는 모두 5개의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 3번째까지는 남자가 노래하고, 나머지 두 노래는 여인이 부른다. 여주인공의 아름다움과(6, 4~9), 호두나무 정원에서의 장면이 연출되며(6, 10~12), 두 줄의 윤무(輪舞)를 추는 여인이 등장한다(7, 1~11). 이어 그들의 사랑이 자연과 조우되고(7, 12~14), 이별을 두려워하는 노래가 이어진다(8, 1~4).
6, 4~9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데, 비슷한 내용이 벌써 두 번이나 등장한 바 있다(1, 9~17; 4, 1~7). 4절에서는 여인이 두개의 도시에 비유되는데, 그 중 하나인 「디르사」는 사마리아 이전에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곳이고(1열왕 16, 23; 여호 12, 24), 「예루살렘」은 남유다의 수도였던 곳이다. 아마도 여인의 아름다움이, 이 도시들의 이름과 연결되어있는 듯 하다. 예를 들어, 디르사는 「좋아함」, 「기쁨」, 「즐거움」과 어원적으로 연결되고, 예루살렘은 「평화」와 연결된다.
즉, 이 이름들이 가지는 「즐거움」-「평화」의 이미지가 여인에게 대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어 노래는 목자적 표상을 통해 여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5~6절), 8~9절은 왕궁의 하렘 중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여인은 아가의 여주인공임을 표현한다(9절).
6, 10~12
이제 새벽빛, 달, 해 등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비유된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면서 인간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그녀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10절). 이어 등장하는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라는 표현은, 그녀의 거부할 수 없는 기품과 권위를 표상한다. 11~12절은 본문이 손상되어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끌어내기 어렵다.
특별히 12절의 「암미-나디브」가 그런 단어인데, 이를 일반명사로 간주하면 「나의 고상한 백성」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칠십인역에서는 고유명사로 이해하여 암미나답(민수 10, 14참조)과 연결시킨다.
새 번역은 칠십인역의 선택을 따르고 있는데, 여기서 어느 것이 맞는지는 구체적으로 결정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남자가 이제 호두나무 정원으로 들어가(11절) 여인과의 결합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7, 1~11
7장에서 여인은 「무희」로서 등장하지만,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 주체는 그녀의 연인이다. 1절에서 그녀는 『슐람미트』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이 표현 역시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아가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등장하므로 다른 맥락(context)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메소포타미아의 여신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고, 「슈남미트」로 읽는다면 슈넴에서 온 여인(1열왕 1, 1~4; 2, 17.21~22)을 의미할 수도 있다. 「샬롬」을 어근으로 하는 솔로몬의 이름과 연결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솔로몬의 여인」(부인) 혹은 「평화의 여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
2절부터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다시 묘사되며 이전보다 훨씬 자세하고 감각적인 것이 특징이다. 5절의 「헤스본」은 요르단 동쪽 아모리족의 수도였으며(민수 21, 27), 나중에는 모압인들의 도시가 된 곳이다(이사 15, 4). 그러나 이 도시에는 5절에 등장하는 「밧라삠 성문」이나 「연못」이 없었기에, 아마도 이러한 표현들은 여인의 맑고 영롱한 눈을 상징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여진다.
6절의 「가르멜」 산은 자부심과 귀족성을 상징하는 곳으로, 여인을 왕의 품위에 비유하고 있다(1, 4.12 참조). 이러한 절대적 칭송에 대해, 이제 아가의 여인은 『나는 연인의 것』이라고 응수하면서(11절; 2, 16과 6, 3 참조), 자신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5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미소 지을 수 있는 성탄위해 기다림에 성실한 오늘 되길
어제 내린 겨울비에 교정의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버렸다. 언제부터인지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이제 그 나무가 견뎌야할 혹독한 겨울을 걱정하는 버릇이 생겼다. 걱정도 팔자인 성격 탓도 있지만, 기다림의 고통을, 그 버려진 듯한 상실감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부터, 나무의 겨울은 외면하기 어려운 고통이 되어버렸다. 그 어떠한 절망 중에도 울지 않고 꿋꿋하게, 아름다운 끝을 기다려온 사람만이 최후의 승자가 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연말(年末)이다. 좀처럼 연인을 만날 수 없었던 아가의 여인도, 이제 그 오랜 기다림의 결실을 맺게 된다. 아무리 슬펐던 기다림도 진솔한 눈물을 품고 있다면, 생의 어느 모퉁이를 돌아서게 되는 순간, 기적 같은 만남으로 위로받을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7, 12~14
이제 여인은 대담한 제안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연인과 함께, 아무런 방해도 없는 들로 나가 자연의 축복안에 밤을 지내자는 것이다. 13절에 표현된 만개한 자연에 대한 비유는, 만개한 그들의 사랑을 상징해준다.
문간에 있는 과일들이 『햇것도 있고 묵은 것도 있다』는 14절의 표현은 그녀가 연인과의 만남을 위해 오랜 시간 「모든 것」을 차곡차곡 간직해 왔음을 말해준다. 그 과일들은 그녀의 삶 전체와 사랑의 역사 전부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8, 1~4
1~2절에서 여인은,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의 남자 형제였으면 좋겠다고 염원한다. 좀 더 쉽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관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그런 관계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둘의 완전한 결합은 3~4절에서 표현되는데 이러한 내용은 이미 2, 6~7에도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이 부분은, 비논리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당신』이라고 불려진 연인은 『그이』라는 3인칭으로 불려지며, 『껴안는다면!』하는 히브리어 「미완료」형은 미래적 시점을 제시하므로, 지금까지의 내용들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꿈」인 듯이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이 다섯번째 시는 사랑을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여인의 간절한 염원으로 마무리된다.
8, 5~14(마지막 시)
아가의 대단원의 막은, 마침내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여 사랑의 영원성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참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고 불길보다 맹렬하다고 노래하는데, 이러한 내용은 아가의 전반적 메시지를 집약적으로 수렴한다. 특히 이 마지막 시는 아가서가, 여러 노래들의 선집(collection)임을 증명해 준다. 각각의 부분들이 서로 연관 없이 모아져 있기 때문이다(5절; 6~7절; 8~10절; 11~12절; 13~14절).
5절
『자기 연인에게 몸을 기댄 채 광야에서 올라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5절)라는 물음으로 시작되는 첫 부분은 3, 6과 6, 10에서도 반복된 바 있다. 다만 8, 5은 화자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고(아마도 여인의 친구들인 듯),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아가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경우이기에, 5절의 동반 등장은 매우 특별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노래를 부르는 이는 역시, 여인이다.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며 노래를 시작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잉태되던 순간부터 그를 사랑해 왔음을 고백한다. 이 부분에 등장한 「사과나무」는 2, 3에서 이미 연인을 상징하는 모티브로 등장한 바 있는데, 이제 그녀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연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던 순간, 즉 그의 생명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줄곧 함께 해왔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알아온 듯한 편안함과 익숙함 때문에 시작된다고 한다. 일곱살이었을 때도, 스물일곱이 되어서도,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어쩌면 우리는, 지금 사랑하는 바로 그 존재를 향해 방향 지어져 있었던건지도 모를 일이다. 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결국은 만나게 되니….
메시아를 그토록 기다려왔던 이스라엘이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고만 것은, 잘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증명해준다. 잘 기다리지 못하면 운명적 만남도 없고, 설사 만났다 하더라도 그를 알아볼 혜안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림절이다. 잘 기다리지 못하면 아름답고 충실한 성탄도 기대하기 어렵다. 모두가 미소 지을 수 있는 성탄을 위해, 좀 더 기다림에 성실한 오늘이었으면 한다. 기다림의 나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곧 오시지 않는가.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12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주변의 사랑과 기도에 진정 감사하는 마음 가져야
난 솔직히, 죽을 만큼 강한 사랑 이야기나 그런 사람들의 소문에 관심이 많다. 어려서도 그런 이야기가 TV에 나오면 자다가도 일어났고, 나이를 먹어서도 증세(?)는 여전하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사랑한다는 일이, 예수님 같은 분이나 실천하실 수 있고, 헐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수 있는 얘기지, 내 주변에서 일어날 확률은, 사실상 거의 없다는 걸 진작부터 알았던 것일까. 오늘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들은 사랑으로 죽음의 고통도 감수하며, 그런 죽음을 통해 오히려 새로운 생명에로 거듭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인어공주가 아름다운 목소리를 마녀에게 내어주지 않았다면, 쉬리의 여간첩 이방희가 사랑했던 유중원의 총에 아련히 죽어가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아름다운 스토리가 완성되었을 것인가를. 오늘 살펴볼 구절에서, 아가의 여인은 사랑이야말로 죽음만큼 강하다는 절대적 진리를 아름답게 노래해주고 있다.
6~7절
6절에서 여인은 자신을, 연인의 가슴과 팔에 새긴 「인장」처럼 지니고 다녀달라고 애원한다. 구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사이에 적용된 바 있다. 유명한 「쉐마 이스라엘」의 한 구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 말을 네 손에 징표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라는 신명 6, 5.8가 바로 그 경우이다. 인장은 일종의 사인으로서, 그 사람 전체를 대표한다. 바로 그런 인장처럼 자신을 가슴과 팔에 새겨 달라는 표현 안에는, 언제나 연인과 함께이기를 원하는 여인의 강한 열망이 들어가 있다. 특별히 가슴과 팔은 인간의 대표적 기능인 「정신」과 「행동」을 상징하기에, 그녀의 염원은 연인의 모든 삶에 함께이고 싶은 마음을 암시한다.
이어 여인은 자신의 사랑을 「죽음」과 「쉐올」(저승)에 비유한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죽음」과 죽음 이후에 가게 되는 「쉐올」은 그 어느 누구도 빗겨갈 수 없는, 매우 강력한 존재들이다. 아가에서 사랑과 죽음, 쉐올이 함께 비유되고 있다는 것은, 사랑과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힘이며, 결국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뿐임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사랑은 「불의 열기」로 표현된다.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격렬한 불길」이라는 표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샬헤베트야」는 「야(훼)의 불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만일 이를 「야의 불길」로 해석한다면, 8장 6절은 아가에서 유일하게 「야훼」라는 이름이 등장한 구절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 형태의 이름 「야훼」가 아니라, 「야」라는 단축형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성서의 일반적 전통에 의하면 불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였다(출애 3, 1~6; 13, 21~22; 민수 14, 14; 신명 1, 33; 4, 11~36; 느헤 9, 12?19 등).
그러므로 사랑이 「야훼의 불길」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사랑이야 말로 「야훼가 현존하는 장소」이며 그 만큼 강한 힘을 내포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7절에서 사랑은 「큰물」(바다, 깊은 심연)과 연결된다. 6절의 「불」과는 상극적 소재인 「물」이 대조되고 있는 것인데, 「물」과 「불」 모두 절대적 힘을 상징한다. 고대근동의 전통에 의한다면, 「바다」, 「깊은 물」은 언제나 강력한 원초적 혼돈과 「악」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바다의 신 라합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악한 힘으로 표상되었고(시편 89, 10~11), 강한 물살과 급류(시편 124, 2~5)는 「죽음의 파도」로 표현되어 있다(시편 18, 5).
이렇게 강한 혼돈인 「큰물」은 「불」을 끌 수는 있겠지만, 『사랑을 끌 수는 없다』(7절). 사랑은 그 어떠한 악의 세력(큰물)도 이겨낼 능력과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 아가의 여인은 사랑이 결코 돈과 재산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언급한다(7절).
『누가 사랑을 사려고 제 집의 온 재산을 내놓는다 해도』, 사람들의 빈축만 살 뿐, 결코 사랑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야훼의 열기」이며 「악」(큰물)을 극복하게 하고, 그 어떤 재화로도 살 수 없다는 아가 8, 6~7의 내용은 이 책이 제시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지금까지 아가는 두 연인의 사랑을 통해 그 사랑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실존」과 「그분의 사랑」을 말해왔던 것이다. 사실,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절대적 메시지는 「사랑」이다.
유명한 「사랑의 송가」(1고린 13장)가 제시하듯, 사랑이 없으면 우린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변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할 때이다. 그들의 사랑과 기도, 눈물이 없었다면 이렇게 무사히 한 해를 살아낼 수 있었을 것인지….
「야훼의 열기」와 주변의 사랑만으로도 삶은 이렇게 이미 충분하다.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19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 사랑 감지하는 지혜로 아름다운 2005년 맞이하길
8, 8~14(부록)
지난주에 살펴본 8, 6~7의 표현들은 아가의 어느 부분보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에 비해 마지막 부분 8~14절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수수께끼처럼 엮어져 있어서 후대에 첨가된 「부록」일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8~10절
여인의 오빠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이미 1, 6에 나타난 바 있다. 고대 근동에서 오빠들은 누이를 보호해야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로 간주되고 있었다. 디나의 오빠들이 그러했고(창세 34장),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도 예외가 아니었다(2사무 13장).
아가 여주인공의 오빠들 역시 동생의 혼사를 위해 그녀를 보호해야할 의무를 느끼는데 그들은 동생이 아직 결혼 적령기에 이르지 않았다고 본다(8절). 그러나 그녀는 오빠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이 이미 성숙한 여인임을 주장한다(10절).
물론 그녀를 「여인」으로 만든 것은 연인이었다. 이제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화평을 찾은 여인』(10절)이 되었다고 말한다.
사랑은 한 사람을 성숙시키며, 그 어떤 억압과 소외의 상황에서도 「샬롬」 즉 평화를 이끌어 주는 것일까.
11~12절
11~12절은 누가 화자로 등장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 등장하는 「바알하몬」도 어디인지 알 수 없는데,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재산의 주인」이라는 뜻이 된다.
많은 학자들은 이 곳을 솔로몬 내궁의 포도원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11~12절의 내용은, 솔로몬이 자기의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각각 은전 천닢을 받고 맡겼다는 것이고, 이는 포도원이 대단한 금전적 가치를 지님을 암시해준다. 구약성서와 아가의 전통에서 「포도원」은 여인을 상징해왔기에, 이러한 포도원의 가치는 곧 여주인공의 가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13~14절
이제 아가의 마지막 부분이 등장하는데 노래를 부르는 이는 여인이다. 아가의 처음을 노래로 시작했던 이도 여인이었고, 마무리 역시 그녀의 몫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처음에 자기 연인을 상징했던 「노루」, 「젊은 사슴」의 소재를 다시금 적용시킨다. 마치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듯 초기에 등장했던 모티브를 적용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연인을 『서둘러 오라』고 초대하는데 그 장소는 「발삼산」이다. 발삼산은 그녀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기에, 이제 연인을 그녀에게로 초대하면서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화의 근원, 사랑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는 정의를 읽은 적이 있다. 때론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그를 기어이 살려내는 것, 그런게 바로 「사랑」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사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그 외적인 결과를 「쟁취」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행복까지 얻을 수는 없다.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오히려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내어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 한해, 심각한 경제난으로, 친부모를 고려장하거나 폭행한 사건들이 자주 보도되었다. 그런데 그런 비상식적 상황에서도 부모들은 자식을 고발하지 못했다. 폐륜아일지라도 부모에게 자식은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진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생의 전부를 걸 정도로 소중한 사랑이, 상대에겐 기억조차 되지 않는 하찮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고단하고 외로운 우리 삶의 현주소이며 이기적 현실인 것이다.
아가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인은 자신을 『화평을 찾은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그녀의 여정을 돌아다본다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비논리적, 폭력적 상황에서도, 조용하고 다정한 얼굴로 그 부당함을 극복함을 기억하기에, 그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 이번 가을 내내 우리와 함께 했던 아가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단면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오랜 시절 감정을 공유해온 사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과 부모들의 사랑을 제외하고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랑이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삶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을 잃고 살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언제나 주변에 계시면서 기적같은 하루하루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감지할 수 있는 지혜만 준비되었다면, 이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결코 초라하지 않고 아름다울 2005년을!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2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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