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애가: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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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8 | 조회수3,629 | 추천수1 | |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애가 (1-2) : 입문 (1-1)
예루살렘 함락 애도하는 노래, 사순시기 절정 성주간에 낭독
내게 사순절은 언제나 「바람」과 함께 연상된다. 봄이 올 것도 같고, 이미 와있는 듯도 한데, 사순절에는 언제나 거칠고 매서운 바람이 불었었다.
그 스산한 분위기는 성주간만 되면 절정으로 고조되어 기습적으로 눈발까지 날리고, 흐린 창밖의 앙상한 나무들은 바람에 어지럽게 흔들리기도 했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사순절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된 후 맞게 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성금요일 오후 3시는, 그때까지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낯설음과 어둠을 마주보게 했던 시간이기도 하다. 어렸었지만 고통은 살아있는 것이었나 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사순절이 시작된 지 이미 오래이다. 이번 주부터는 사순시기에 주로 낭독되는 「애가」를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개관
애가는 룻기, 아가, 코헬렛, 에스텔과 함께 「다섯 개의 축제 두루마리」로 불리는 「메길롯」에 속해있다. 이 책들의 특징은 각각의 고유한 전례 기념일에 낭독된다는 것인데, 애가는 히브리 달력으로 아브월(대략 7∼8월) 9일, 「예루살렘 함락사건」을 애도하는 기념일에 봉독되었다.
이런 전통이 그리스도교에 그대로 유입되어, 애가는 주로 사순시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주간에 낭독된다.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비극적 사건 대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애도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제목
이 책의 히브리어 제목은, 1장 1절에 등장하는 히브리어 「에카」이다. 이는 고통스러울 때 저절로 나오게 되는 탄식소리로, 「아아!」, 「아이고!」 등을 의미한다.
이 제목은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에서 「쓰레노이」(슬픔의 노래, 조가 弔歌)로 조정되었고, 라틴어 성서에서는 「라멘타씨오네스」 (Lamentationes; 탄식, 애도)로 번역되었다.
라틴어 성서는 이 제목 외에도 그리스어 「쓰레노이」를 그대로 음역한 「쓰레니」(Threni)를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어 번역은 칠십인역과 라틴어 성서의 제목을 번역하여 「애가」(哀歌)로 부르고 있다.
저자
칠십인역과 불가타 성서는 이 책을 예레미야서 뒤에 배치시켜 놓고 있다. 이러한 배열은 애가의 저자를 예레미야로 간주하는 고대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애가를, 「예레미야의 애가」라고 부르기도 한다(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경우). 이러한 입장을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는 듯, 칠십인역은 애가 1, 1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고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고 예루살렘이 사막으로 변하자, 예레미야는 주저앉아 눈물지으며 예루살렘을 위한 애가를 부르며 말하였다』 라는 문장을 덧붙여 놓고 있다.
애가의 저자를 예레미야로 보는 전통은, 예레미야가 유다의 임금 요시야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가를 지었다고 보도하는 2역대 35, 25에 근거를 두고 있다.
특별히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셉푸스는 예레미야가 요시야를 위한 조가를 부를 때, 앞으로 있을 두 번의 예루살렘 파괴(바빌론과 로마에 의한)를 예고하였다고 설명함으로써 예레미야 저작설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전반적 논지가 애가의 논지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예레미야가 이 책의 저자라는 확실한 근거를 애가의 내용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기에, 학계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애가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노래들은 서로 그 형식과 기조를 달리하기에, 동일한 출처를 주장하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일부학자들은 이 책이 여러 저자들의 기록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애가는, 바빌론 포로기에 대하여 별 구체적 언급이 없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팔레스티나에 남아있던 레위 그룹에 의해 제작된 작품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저자에 대한 정확한 단정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따뜻한 바람
자주 바람이 불고 검은 먹구름까지 덮이는 사순절이지만, 성주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햇볕도 따스해진다. 이상한 일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 세상 모든 죄가 소멸되고 나면, 그러면, 바람의 방향도 바뀌는 것일까. 따뜻한 남쪽의 바람으로…. [가톨릭신문, 2005년 3월 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고통 다가오고 삶이 무너질 때 우리의 미련함과 죄 반성해야
며칠 전이었다. 개강도 했고 근무지인 광주에도 다시 내려왔고 해서, 어느 지인께 안부 전화를 드리게 되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라는 나의 의례적인 인사에, 응…. 살아있어…. 라는 대답이 차분하게 들려왔다.
살아…. 있다니? 전화기 저편의 고요함은 엄살 많고 호들갑스럽던 내 목소리의 거품을 단 한번에 걷어내기 충분한 것이었다.
살아있다는 것, 도대체 무엇이 살아있는 것일까? 수없이 자문해온 화두이기도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단 한번도 답을 찾아내지 못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통화이후 돌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무 가식이나 포장 없이 매순간 스스로에게, 그래, 살아있어, 라고 미소 지으며 대답할 수 있는 것, 그런게 아닐까라는….
애가는 유다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것(즉 예루살렘)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삶이 무엇인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게 되면서 제작된 일종의 「신학적 반성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야 비로소 이전에 누리던 삶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 삶과 운명이 가지는 본질적 비극은 아닐는지.
제작 연대
애가에는 유배가 시작되던 당시의 정황들이 상당히 섬세하게 기록되어있다. 바빌론의 무차별한 살육과 남은 자들이 겪는 공포,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지(기원전 587년) 얼마 안 돼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다섯 편의 애가 모두 각기 다른 시기에 저술되었다는 의견도 간과할 수 없는데, 각각이 제시하는 배경과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애가의 용도
이스라엘의 고유기념일 중의 하나인 「티샤 베아브」(성전파괴 기념일)는 이스라엘 달력으로 「아브」달(대략 7~8월) 제9일(티샤)에 지낸다. 유다인들은 서기 6세기이후부터 이날에, 제1성전 파괴(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하여)와 제2성전 파괴(서기 70년, 로마에 의하여)를 기억하고 슬퍼하며 애가를 낭독해왔다고 한다.
티샤 베아브
2열왕 25,8~9과 예레 52,12은 제1성전이 파괴된 날을 각각 아브달 7일과 10일로 제시한다. 그러나 몇몇 열왕기사본과 루치아노의 칠십인역본, 그리고 랍비전통에서는 7일부터 성전외곽이 파괴되기 시작하였고, 성전 본건물이 파괴된 것은 9일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다인 전통은 「재난의 날」을 9일로 설정해왔다. 탈무드 전승에 의하면, 공교롭게도 제2성전이 파괴된 날도 역시 아브달 9일이어서, 이 날이 가지는 비극적 의미를 중첩시키고 있다. 이날, 유다인들은 단식을 지키고, 목욕, 기름 바름, 향수 등을 금하고 가죽신을 신지 않는 것으로 애도를 표시한다.
경전성
애가의 경전성이 문제로 제기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만큼 내용이 신학적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경전상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 히브리 성서에서 애가는 「성문서」에 해당되는 「메길롯」에 속해있지만, 칠십인역과 라틴어역에서는 예레미야 예언서 다음에 등장한다. 즉 「예언서」 부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구성
애가는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섯 개의 조가(弔歌)형식을 띄고 있다. 1~5장은 모두 22절(단, 3장 제외)로 되어 있는 일관성을 보여주는데,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노래를 이어간다(단, 5장 제외). 이러한 알파벳 기법은 시편(9~10; 2; 34; 37; 11; 112; 119편 등)과 잠언(31, 10~31)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암기를 용이하게 한다.
삶의 붕괴가 주는 의미
애가가 묘사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파괴」는 곧 이스라엘의 「몰락해가는 신앙」, 「무너진 자아」에 대한 결정적 경고였다. 하느님의 징벌은 인간의 방자함에 대한 경고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통이 다가왔을 때, 그렇게 다시 한번 삶이 무너질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이건 또 무슨 미련함과 죄에 대한 경고인지를.
온갖 가식과 장식으로 서로를 사로잡으려 혈안이 되어있는 21세기 오늘, 그런 병든 열정과 경쟁 때문에 번번이 실망하고 번뇌하며 비난받아 왔으면서도 아직 헤어나지 못한, 그런 무력한 나 자신을, 오랜만에라도 마주하게 하기위해, 그분은 우리에게 고통을 선물로 주신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일격으로도…. [가톨릭신문, 2005년 3월 13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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