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비겁한 아버지 야곱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시편 - 그럼에도 하느님의 자비가!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12-14 | 조회수3,783 | 추천수1 | |
[성서의 인물] 비겁한 아버지 야곱
라반 삼촌의 집을 떠나 야곱은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야곱은 지난 이십년의 세월을 곱씹어 보았다. 그 옛날 형 에사오의 살기(殺氣)를 피해 고향을 허겁지겁 도망쳐 나오던 일 그리고 라헬과 레아와의 결혼 삼촌 라반에게 겪은 사기와 실망 등 이십년의 세월이 눈앞을 스쳐갔다. 고향을 떠나올 때 청년이던 야곱은 이제 중년이 되어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지난 이십년의 세월이 마치 곡예를 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이십년 동안 묵은 공포가 야곱을 엄습했다. 그 공포는 다름 아닌 형 에사오였다.
“형 에사오가 아직도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있을지도 몰라. 혹시라도 형의 노여움이 가시지 않았으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 사실 고향을 떠날 때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말했었다.
“야곱아 네 형 에사오가 너를 죽여 한을 풀려고 한단다. 그러니 절대 에사오에게 붙들리지 말아라….”
야곱은 두려웠다. 그는 비상한 머리로 다시 필사의 계획을 짜낸다. “형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야곱은 푸짐한 재물과 함께 머슴을 앞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전하라고 당부했다.
“못난 아우 야곱이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라반 삼촌집에 몸붙여 살며 지내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제는 저도 황소와 나귀 양떼가 생겼고 남종과 여종도 거느리게 되어 잘살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너그럽게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런데 에사오에게 다녀온 머슴들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전했다. “주인님 형님 에사오께서 부하 400명을 거느리고 주인님을 만나러 오십니다.”
야곱은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일행과 양떼 낙타떼를 두 패로 나누게 했다. 혹시라도 에사오가 쳐들어오면 반이라도 건지려는 얄팍한 속셈에서였다. 그리고 다급해지자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저에게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면 제 앞길을 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 약속을 지켜주세요. 정말 무섭고 떨립니다. 형 에사오가 가족들까지도 몰살해 버릴 것 같습니다. 하느님 살려주세요….”
야곱은 형 에사오의 마음을 풀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야곱은 자기 소유물 중에서 좋은 것들만 골라 에사오에게 선물을 보내려고 작정했다. 그리고 종 여럿을 뽑아 시간차를 두고 에사오를 만나게 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종 야곱이 형님 에사오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야곱은 뒤에 오십니다”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형 에사오가 선물을 받으면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다음날 야곱의 눈에 바람을 일으키며 부하들을 거느리고 오는 에사오가 들어왔다. 야곱은 공포심이 극에 달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시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려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자녀들을 앞장 세웠다. 그리고 레아와 그의 자녀들을 뒤따르게 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야곱은 자기가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뒤로 두어 안전한 곳에 배치하려 했다. 앞서 가는 어린 자녀들이 뒤돌아보며 야곱에게 물었을 것이다.
“아빠 아빠는 왜 안 오세요. 무서워요. 저희와 함께 가세요. 어서 빨리요….” “얘들아 이 아빠는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어. 그러니 어서 먼저 가거라….” 야곱은 떨리는 입술로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야곱은 아내와 아이들을 위험한 상황에서 앞세웠던 비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라헬과 아들 요셉은 맨 뒤에 있게 했다.
그는 절체절명의 극한 상황에서 가족을 앞장 세웠다. 혹시 에사오가 공격을 하면 앞선 가족들을 남긴 채 라헬과 요셉만 데리고 도망가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 인격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고 한다. 야곱은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다 똑같아. 그런 상황이 되면 누구나 똑같이 행동할거야. 아니라고 장담하지만… 어디 한번 그런 상황이 닥쳐봐. 다 저 살기 바쁜 거야….”
[평화신문, 1999년 9월 19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