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13: 데르베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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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4-30 | 조회수3,550 | 추천수1 | |
[동녘에서 서녘까지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오로] (13) 데르베에서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다
- 작가노트 = 돌팔매질 당한 참혹한 상태의 바오로 사도는 침대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의 침대는 선교의 축복된 장소였고, 고통 속에서도 교회는 성장해 나갔다. 사도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세워진 모든 교회를 돌보는 그분의 커다란 손길을 상징적으로 그려봤다. 광범한 지역에 뿌려진 믿음의 씨앗이 풍성한 축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오로 사도가 리스트라에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기적적으로 생존한 뒤 두 사도는 그날 밤으로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사도가 죽었다고 여긴 유다 광신자들이 사도께서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시 뒤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상처투성이가 된 바오로 사도는 걷는 것조차 불가능해 시골 마차로 옮겨야만 했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리스트라에서 여덟 시간 가량 떨어진 같은 리카오니아 지방 데르베(Derbe, 오늘날 카라만 읍내에서 동북쪽으로 23㎞ 떨어진 케르티 회육)로 갔다. 돌팔매질을 당한 상처들로 인해 생긴 흉터는 그의 몸에 평생 남아 있게 된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도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갈라 6,17).
고통 중에 탄생한 데르베 교회
전날 엄청나게 많은 피를 흘리고 아물지 않은 상처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고나서도 마차로 40㎞나 되는 사막을 건너는 고통을 견뎌낸 사도의 육체적 강인함과 인내에 경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유다인들은 바오로가 죽었다고 생각했기에 더 이상 그를 추적하지 않았다. 데르베에서 두 사도는 가이오스의 집에 유숙할 수 있었다. 가이오스는 마케도니아에서 바오로를 동행하기도 한다.(사도 20,4 참조)
바오로는 참혹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데르베에서 한동안 침대에 누워 지내야만 했다. 그런데 침대가 선교활동을 위한 하나의 축복된 장소가 된다.
데르베 그리스도교회는 이처럼 갈라티아의 다른 세 곳 교회처럼 고통 중에 탄생했다. 데르베에서 사도들의 선교활동 무대가 악기올 호수 주위 이웃 고원지대로까지 확산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적어도 1년 이상 선교가 계속됐다고 여겨진다.
훗날 대바실리오는 성 그레고리오 신학자 등 그리스도교회의 훌륭한 교부들과 신학자들을 숱하게 배출한 카파도키아도 사실은 이곳 리카오니아에서 복음의 빛을 얻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시리아 접경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키프로스를 거쳐 남부 소아시아 지방으로 제1차 선교여행을 시작한 지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데르베에서 256㎞ 정도 떨어진 바오로 사도의 고향 타르수스로 내려감으로써,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시리아 쪽 안티오키아로 돌아간다면 현재 체류 중인 데르베에서 자신들의 귀향 길을 훨씬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노력과 희생으로 세워 놓은 '모든 교회를 돌보심'이 그때부터 바오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신이 쫓겨 도망치기에 앞서 세워놓은 리스트라 교회들, 이코니온 교회들,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교회들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보기를 원했다.
박해했던 도시로 다시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굳건한 믿음을 지니고 있을까?
새로운 신자들이 박해로 흔들리지 않도록 특별한 가르침이나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두 사도는 자신들이 거치며 선교했던 도시 신자들을 다시 만나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또 신자들로 국한해 설교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귀향 여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도들은 목숨을 위협했던 도시들로 다시 나아가는 것에 겁을 내지 않았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하고 있으며, 그것이 주님의 복음 사업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마지막으로 기본 조직을 형성했다. 사도들은 도처에 각 교회 예배와 정신적, 영적 필요에 따라 교회 공동체마다 장로들과 사제들을 세웠다. 그리고서 바오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 14,22-23)하고 말했다.
피시디아에서 바오로가 서품을 했던 주교들 중 한 분은 성인으로 알려진 셀레우키아 아르테몬 주교다. 다른 주교들은 그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의 그리스도인들을 항상 기억하고 돌봤다. 그것은 바오로가 제2차, 제3차 선교여행 동안에도 그들을 잊지 않고 갈라티아를 방문했던 데서 잘 알 수 있다. 거기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알게 됐을 때, 바오로는 그들에게 그 유명한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썼던 것이다.
안티오키아에서 고별예배 후에 이들 두 사도는 피시디아에서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내려왔다.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사도 14,24-25). 열성적인 사도들이 지나갔던 모든 곳에서 전에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이사 9,1)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게 빛나는 주교들이 세워졌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풍성한 열매 거둔 1차 선교여행
바오로가 뿌린 믿음의 씨앗과 그곳 들녘에서 말씀의 씨앗을 뿌린 대농부를 따라 행한 자는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됐다.' 수세기에 걸쳐 성 메토디오 파타라의 주교, 기적의 성인 니콜라오 미라의 주교, 성 테클라와 성 마리나 같은 수많은 순교자들, '정신적 지주이자 매우 빛나는 별들'로 빛나는 성인들이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법적으로 아탈리아라 부르는 광범한 지역은 바오로가 여러 차례 방문했던 축복 받은 땅이다.
복음서 저자인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전한다.
"우리는 그들과 헤어져 배를 타고 곧장 코스로 갔다가, 이튿날 로도스를 거쳐 거기에서 다시 파타라로 갔다"(사도 21,1).
바오로 사도는 훗날 그가 로마에서 재판을 받도록 인도하는 호위병들과 함께 떠날 때 이 땅을 마지막으로 밟는다. 복음서 저자 루카는 이때도 그를 따라갔으며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킬리키아와 팜필리아 앞바다를 가로질러 리키아의 미라에 이르렀다"(사도 27,5-6).
아탈리아 항구를 출발한 두 사도는 제1차 선교여행을 떠난 셀레우키아로, 시리아 접경 안티오키아 빈디오 항구도시로 향하는 배를 탔다. 첫 번째 선교 여행은 주님께서 풍성한 축복을 내렸다.
인내와 피흘리는 투쟁으로 그리스도 편에서 승리했던 살라미스, 파포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코니온, 리스트라, 데르베, 페르게의 일곱 요새에서 승리의 트로피를 갖고 다시 돌아갔다.
[평화신문, 2011년 4월 24일, 글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 그림 정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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