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민수기: 우리가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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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1-08-26 | 조회수3,430 | 추천수1 | |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민수기 - 우리가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가냘픈 힘으로 견뎌 보긴 하지만 / 여기엔 물은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사도砂道뿐 / 이 길은 꾸불꾸불 산으로 올라간다 이 산은 물 없는 암산岩山 / 물이 있다면 우리 발을 멈추고 마실 것인데 바위 틈에서 우리는 멈출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에 파묻혀 / 바위 틈에 다만 물이 있다 해도 썩은 이빨의 죽은 산 아가리에선 물을 뿜지 못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중山中엔 정적마저 없고 비가 따르지 않는 메마른 불모不毛의 우뢰가 있을 뿐. (T. S. 엘리어트, ‘황무지’ 중에서, 이창해 역)
10,11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증언판을 모신 성막에서 구름이 올라갔다. 12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시나이 광야를 떠나 차츰차츰 자리를 옮겨 갔다. 그 뒤에 구름은 파란 광야에 이르러 내려앉았다.
시나이 산 출발을 보도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명을 따라 이집트를 떠난 지 일 년째 되는 해에 성막을 세우고(탈출 40,2.17 참조), 한 달 뒤에 첫 번째 인구 조사를 하고(민수 1,1-2 참조), 열아홉 날째 즉 이집트를 탈출한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시나이를 떠났습니다. 광야를 횡단하는 데는 전통적으로 4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민수 33,38; 아모 5,25 참조).
그들은 구름이 올라가는 것을 출발 신호로 알고 자리를 옮기기 시작합니다. 구름이 출발과 정지를 알리는 신호가 되어 이스라엘을 파란 광야로 인도합니다. 구름은 이집트를 탈출해 나올 때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해 주었습니다(탈출 13,21-22 참조).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집트 탈출과 광야 여정 등 이스라엘의 모든 움직임이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 주도권이 있습니다. 구름의 인도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고 낮이나 밤이나 그들을 이끌고 돌보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제 계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은 광야 여정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며 신뢰를 배우고 하느님을 구심점으로 결속할 것입니다.
11,4 그들 가운데에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이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 자손들까지 또 다시 울며 말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5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6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 합류한 외국인들이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 백성까지 덩달아 울며 고기가 먹고 싶다고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냅니다. 이집트에서 먹던 생선, 오이, 수박, 부추와 파와 마늘을 생각하고 여기에서는 만나밖에 없다며 불평합니다. 비록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지만 먹을거리는 분명 광야의 처지보다 나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의 백성에게 생명의 양식인 만나를 내려 주셨지만, 그들은 이제 만나에 싫증을 냅니다. ‘이 보잘것없는’(민수 21,5) 만나와 달리 여러 가지를 다양하게 먹었던 이집트 시절을 그리워하며 불평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탐욕’을 부렸다고 이야기합니다. 탐욕 곧 지나친 욕심에서 불평이 쏟아집니다. 백성의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할 때 불평이 제기됩니다.
불평은 신앙 공동체를 위협하며 구원의 목표를 향한 여정을 가로막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손길을 거부하고 자기 욕심을 앞세우며 제 뜻대로 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들은 벌써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 주신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불평은 성경이 다루고 있는 광야의 중심 주제입니다. 광야의 입지 조건인 목마름, 배고픔, 전쟁의 위협 중에 하느님께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구원을 베푸시지만,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하면 심판이 따릅니다.
불평의 근본 문제는 하느님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결국 신앙의 시련을 받는 장소이며,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배우는 장이 됩니다. 광야 여정 중 한계 상황에 처하여 이집트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며 과거의 기억과 애착과 기본 욕구마저 끝없이 비우고 떠나,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순례를 지속하는 것이 구원의 미래를 열어 가는 지혜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을 때 그들은 이미 노예 생활이 주는 자족과 안전을 버리고, 참된 자유가 가져다 주는 고달픔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이 결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 탈출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광야 여정 중에 계속되는 하느님의 부름이기에, 이스라엘은 매순간 새롭게 응답해야 합니다.
12,1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미르얌과 아론은 모세가 아내로 맞아들인 그 에티오피아 여자 때문에 모세를 비방하였다. 2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주님께서 이 말을 들으셨다. 3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
모세가 외국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에 대한 비방은 곧바로 모세의 권위와 역할에 대한 항의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 모세만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미르얌은 예언자였고 아론은 사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직책을 무기 삼아 모세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께서 손수 세우신 백성의 지도자로 그의 권위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모세가 지닌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위와 역할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지도자에 대한 불신과 불평은 계약 공동체의 위계와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여 공동체가 와해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불평을 듣고 즉시 개입하시는데, 모세의 겸손이 먼저 언급되는 것은(민수 12,3 참조)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 대한 그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모세의 겸손은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데서 나오는 자세입니다. 주님의 종으로 하느님 손에 자신과 온 백성의 운명을 내맡기고 그분의 주도권에 승복하는 모세의 겸손과 그에 따른 하느님의 개입으로 공동체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의 권위를 다시 세워 주시고 공동체를 보존해 주십니다. 주님은 공동체를 형성하실 뿐 아니라 보존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이집트에서 나올 때 모세가 주님의 종의 권한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것처럼 광야 여정에서도 그가 백성을 인도할 것이며 온 백성이 그를 따라야 한다고 확실하게 해 주십니다.
[성서와함께, 2010년 8월호, 서효경 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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