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17: 티베리아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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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5-17 | 조회수3,692 | 추천수1 | |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7) 티베리아스 티베리아스(Tiberias)는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 - 기원후 39년)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신약성경에서 갈릴래아 호수는 이 도시의 이름을 따라 티베리아스 호수라고도 불린다.
■ 위치와 지형 티베리아스는 갈릴래아 호수의 남서안에 위치한 큰 도시이다. 고대의 티베리아스는 현대 도시의 남쪽, 즉 함마트 티베리아스(Hammat Tiberias)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티베리아스의 동쪽 경계는 갈릴래아 호수이고, 서쪽 경계는 베레니케 산(Mount Berenice)인데, 이 산의 명칭은 아그리파 2세의 여동생 이름에서 유래한다. 티베리아스는 나자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30km, 타브가에서 남쪽으로 약 12km, 막달라에서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티베리아스는 해수면보다 207m 낮은 지점에 있다. 티베리아스라는 명칭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기원후 14-37년)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 신약성경의 티베리아스 구약성경에서는 티베리아스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기원후 18년경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티베리아스를 세운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인물이다. 신약성경에서 이 도시는 요한 6,23에 언급된다.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그리고 티베리아스 호수라는 명칭은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의 시작인 요한 6,1(“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의 시작인 요한 21,1(“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에서 언급된다. ■ 티베리아스의 역사와 전설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의 수도를 세포리스(Sepphoris)에서 티베리아스로 옮겼다. 그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재능 있는 통치자요 정치가로 역사가에 의해 평가되기도 한다. 요세푸스의 문헌에 따르면, 헤로데 안티파스는 티베리아스에 다양한 공공건물들, 즉 경기장, 궁전, 회당 등을 건설하였다. 궁전은 황금 지붕을 가지고 있었고(『생애』 66), 회당은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건물이었다.(『생애』 277) 헤로데 안티파스의 후계자 아그리파 1세(37-44년)가 죽은 후 티베리아스는 유다의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61년에 네로 황제는 이 도시를 아그리파 2세(53-100년)에게 주었는데 그의 수도는 카이사리아 필리피였다.(『생애』 38) 제1차 유다 항쟁(66-70년) 동안 티베리아스의 귀족들은 아그리파 2세와 로마인들을 지지하였다. 이 시기에 요세푸스는 티베리아스를 요새화하였다.(『유다 전쟁사』 2권 572-573) 그리고 제2차 유다 항쟁(132-136년) 이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년)은 이 도시를 이방인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런데 기원후 2세기 중엽에 라삐 시메온 바르 요카이(Rabbi Simeon Bar Yochai)는 티베리아스를 정화하였다. 그 후 이 도시에는 세포리스에 있던 여러 유다인들의 제도와 기관들이 옮겨졌고, 유다인들의 종교와 학문의 중심지가 된다. 미쉬나를 편찬한 라삐 유다 하-나시(Judah ha-Nasi, 135-217년)의 제자인 요하난 벤 납파하(Johanan ben Nappaha, 180-279년)는 220년 경에 티베리아스에 라삐 학교를 세웠다. 이 도시에서 미쉬나, 예루살렘 탈무드와 다른 라삐 문헌들이 완성되었다. 산헤드린의 마지막 모임이 이곳에서 개최되었고 그 뒤를 잇는 유다인 학술원인 에쉬바(Yeshiva)가 생겨났다. 특히 8세기에서 10세기에는 벤 아쉐르(Ben Asher) 가문이 자음으로 된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모음 부호를 첨가하는 작업을 하였다. 티베리아스에는 유명한 라삐들이 많이 묻혔다. 엘하데프(Elhadeff) 거리와 학캄 라삐(Hakkam Rabbi) 거리 사이에, 즉 현 시내 중심가에서 걸어서 멀지 않은 위치에 그들의 무덤들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은 라삐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와 모세 벤 마이몬(Moses ben Maimon)이다. 전자는 얌니아(Jamnia) 혹은 야브네(Javneh)에 첫 라삐 학교를 세웠고, 후자는 12세기의 가장 유명한 유다인 현자이다. 이들의 무덤보다 더 언덕 위에 흰 지붕 아래에는 라삐 아키바(Rabbi Akiba)의 무덤이 있다. 탈무드에 따르면, 그는 제2차 유다 항쟁 당시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ba)를 메시아로 선언하였으나, 결국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티베리아스의 남쪽에 있었던 함마트 티베리아스의 폐허에는 온천이 유명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온천은 1세기에도 사용되었다.(『생애』 85) 이 온천에는 온도가 140도가 되는 뜨거운 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티베리아스에는 모자이크를 가진 기원후 4세기의 회당도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티베리아스와 관련된 전설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티베리아스의 명칭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함마트 티베리아스의 온천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전설은 티베리아스라는 이름의 기원을 설명한다. 히브리어 단어인 타부르(tabur)는 배꼽 혹은 몸의 중심을 의미한다. 기원후 3세기의 라삐 예레미야(Jeremiah)는 티베리아스가 이스라엘 땅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티베리아스 유다인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라삐 하임 아불라피아(Haim Abulafia)는 1742년에 이곳을 찬양하는 편지를 썼다. “이 곳은 매우 거룩하며 이스라엘 땅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래서 티베리아스, 즉 주님의 중심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히브리어 단어인 타부르(tabur)는 중심을 뜻하고 야(yah)는 주님을 의미한다. 두 번째 전설은 왜 함마트 티베리아스의 물은 뜨거울까에 대하여 설명한다. 다윗의 아들인 유명한 솔로몬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 중에 가장 지혜로운 이로 찬양받는다. 중세 이전의 유다인 민간전승에 따르면, 『솔로몬의 유언집』에도 기록된 대로, 솔로몬은 성전을 세우고 병자를 치유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악령을 통제하였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악령의 무리에게 명령하여 함마트 티베리아스에서 샘솟는 물을 가열시켰다. 악령들이 그들의 일을 시작했을 때 솔로몬은 그들을 귀먹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솔로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계속 물을 가열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솔로몬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5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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