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여인: 하혈하는 여인 - 예수님께 건 마지막 희망과 믿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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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6-03 | 조회수4,047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여인] 하혈하는 여인 예수님께 건 마지막 희망과 믿음, 치유와 구원의 새 삶으로 이끌어 마르코 복음사가는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을 소개한다(마르 5,25-34). 보통 여인은 규칙적인 월경을 하는데, 이 병은 월경과 무관하게 불규칙적으로 하혈을 하는 병이다. 성경은 여인이 이런 질병을 열두 해 동안이나 계속 앓았다고 한다. 여인의 질병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이다. 이 질병으로 인해 여인은 육신적으로 고통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철저하게 고립된 여인 구약성경은 이 혈루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여자가 불결한 기간이 아닌데도 오랫동안 피를 흘리거나, 불결한 기간이 끝났는데도 피를 흘리면, 피를 흘리는 동안 내내 그 여자는 부정하다. 불결한 기간일 때처럼 그 여자는 부정하다. 그 여자는 피를 흘리는 기간 동안 눕는 잠자리도 모두, 불결한 기간에 눕는 잠자리처럼 다루어야 한다. 그 여자가 앉은 물건도, 불결한 기간에 부정하듯, 모두 부정하게 된다. 그것들에 몸이 닿는 이는 모두 부정하게 된다. 그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한다. 그는 저녁 때까지 부정하게 된다”(레위 15,25-27). 유다인의 이런 규정에 따라 혈루증에 걸린 여인은 첫째,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을 받았다. 개인적 죄로 인해 그런 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되었다. 당시 랍비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한 혈루증을 앓거나 나병에 걸릴 위험은 조금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둘째, 하혈하는 여인과 접촉하거나 교제하는 사람은 누구나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이 여인은 종교적 예배와 축제 등에서 배제될 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회 안에서도 완전히 고립되어 소외받았다. 사람들이 이 여인을 멸시하고 공동체 안에서 추방할 뿐만 아니라, 이 여인 역시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서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늘 피해야 했다. 마음속으로는 이웃과 깊은 친교를 나누고 싶었어도, 가까이 다가오는 이웃에게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마시오.” 하고 외쳐야 했다. 이 여인이 겪은 고통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인은 혈루증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을 직접 상징하는 피가 자신의 몸에서 점점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여인은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흘릴 수 있다는, 그래서 생명의 모든 힘을 다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이런 극도의 불안 속에서도 여인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의사의 도움으로 반드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병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기대 밖으로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자 여인은 이내 실망에 빠졌다. 그러나 여인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이름난 다른 병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여인은 치료를 단념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치유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확신으로 모든 것을 시도한다. 모든 재산을 다 바치면서까지 노력했다. 그러나 병이 치유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었다. 이런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26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다 이처럼 모든 노력에서 실패를 맛보았던 이 여인은 어느 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27절). 당시에 예수님의 행동과 기적들은 세상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아 이미 온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의 소문이 더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예수님을 한번 뵙고 싶은 갈망이 간절했을 것이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을 온전히 고쳐 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모든 노력이 실패한 지금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만 의지하고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이런 간절한 상태에서 어느 날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혹은 그분에게서 치유를 받기 위해 몰려온 군중 속에 끼어들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힘을 다시 주시면서 자신을 반드시 치유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군중이 쇄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다가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이렇게 여인이 아주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그 질병 때문에, 곧 부정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통념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열성적인 유다인은 공공의 장소에서 여인과 인사를 나누거나 만나는 일을 피했기 때문이다. 질병으로 인해 계속되는 부정의 상태, 여성이라는 존재, 천성적인 겸손의 자세 등으로 말미암아 여인은 자기 자신이 참으로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더욱 깊이 느꼈다. 이 때문에 당시에 매우 특별한 분으로 부각되셨던 예수님께 직접 무엇인가를 청하는 일은 이 여인에게 실로 어렵고, 아니 처음부터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28절) 하고 확신하며 행동했다. 그러므로 이 행동은 여인이 처한 처지에서 큰 용기와 함께 조금도 흔들림 없는 확고한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새 삶을 주시는 예수님 여인의 희망은 실제로 실현된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이루어진다. 곧 여인은 말끔히 치유된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댐으로써 그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권능이 여인의 존재 구석구석에 들어와 그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혈루증만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항상 인간 존재 전체, 특히 각 개인의 인격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 삶 자체를 방해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폄하하고 얕잡아 봄으로써 보잘것없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그런 느낌과 생각에서도 여인을 온전히 해방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 하고 물으신다. 그리고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를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신다(32절). 이런 물음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대중의 익명성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행동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여인은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33절) 이렇게 엎드려 있는 자세는 이내 똑바로 일어서게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행동과 말씀을 통해서, 불의한 금기, 선입관, 차별대우 등이 당신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은 그릇된 금기를 깨신다. 그분은 이른바 부정하다는 환자를 만나고 접촉하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으시고, 여인도 이를 더 이상 금기시 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한 인격으로, 당신 자녀의 한 사람으로 진지하게 받아주신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34절)라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여인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소중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인격적인 존중은 여인에게 완전히 새로운 자긍심을 갖게 하고, 동시에 그동안 단절되었던 사회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이런 온전한 치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지만, 여인의 믿음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고,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표현되었다. 이런 깊은 신뢰를 통해 여인은 당시에 금기시 되었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는 일은 일종의 확고한 믿음의 표현으로서 그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준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이런 태도를 칭찬하셨다면, 이런 칭찬은 우리에게도, 삶을 병들게 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내고, 우리 자신의 참된 치유를 갈망하며 추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를 궁극적으로 치유하는 것은 하느님 그분,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쌍백합, 제23호, 2008년 겨울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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