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여인: 안나, 사라, 아드나 - 절망 속 희망찾기 제시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성경] 말씀 단상: 해방(사랑)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3-06-04 | 조회수3,573 | 추천수1 | |
[성경 속의 여인] 안나 - 사라 - 아드나 절망 속 희망찾기 제시 구약성경 토빗기는 하느님의 섭리, 선행, 율법에 따른 엄격한 삶, 인간의 불행, 가정과 혼인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히브리 성경에 수록되어 있지 않는 토빗기의 이야기들은 조금 더 후대에 기록되었던 지혜문학과 유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낙천적인 내용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곧 하느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유배지에서도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결국 모든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말한다.
토빗기는 우리에게 세 여인을 소개한다. 남편 토빗과 아들 토비야와 더불어 니네베에서 살았던 안나, 토빗의 친척 사라, 마지막으로 사라의 어머니 아드나를 소개한다. 토빗은 유배생활을 하던 친척들과 동족들에게 많은 자선과 선행을 베풀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으며, 살해된 동포들을 몰래 묻어 주었다. 그러나 토빗은 모진 운명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고통을 당한다. 곧 그는 갑자기 벼슬은 물론이고 재산도 모조리 몰수당하고,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눈까지 멀게 된다. 그러자 그의 아내 안나는 그에게 불만을 털어놓는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토빗 2,14) 토빗의 친척 사라도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나 불행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토빗기는 재산이 많은 부유한 젊은 여자가 일곱 번이나 결혼을 하여 남편을 맞이했지만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남편이 죽었다는 유명한 대중적 설화를 모티브로 사용하여, 사라의 불행을 언급한다. 악령이 사라를 사랑하기에, 사라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모든 남자를 죽인 것이라고 말한다. 사라는 안나와는 달리 자신의 곤경을 하느님께 간절히 호소한다.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대기하고 또 그분 앞으로 들어가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인 라파엘”(토빗 12,15)은 사라로 하여금 젊은 토비야를 만나게 해준다. 아드나에 관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결코 흔들림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듣는다. 그의 확고한 신앙은 결코 절망한 적이 없다. 그는 감사와 축복의 말을 전하면서 자기 딸 사라를 토비야에게 맡긴다. 안나 이 세 여인은 각각 서로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아드나는 흠잡을 데 없는 여인이지만 활달하지 않았다. 사라는 행복하게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안나는 큰 불행으로 인해 가장 나쁜 상태에 있다. 그의 불만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는 가족이 겪는 궁핍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품을 팔며 열심히 일한다. 그는 품삯으로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받았지만, 남편은 남의 물건을 훔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한다. 토빗과 안나의 외아들인 토비야는 아버지의 분부대로 아주 위험한 먼 여행길을 떠난다. 토비야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안나는 걱정과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아이고 얘야, 내가 어쩌자고 너를 떠나보냈단 말이냐? 내 눈에 빛인 너를!”(토빗 10,5) 따라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토빗기에서 안나는 아드나와는 달리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나타난다. 남편의 계속된 불행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아들의 긴 여행에 대해 걱정을 일삼는다. 라파엘 성경은 하느님의 사신, 곧 하느님의 전령으로서 의인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천사를 익히 알고 있다. 이 천사 가운데 유명한 세 천사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이다. 라파엘 천사는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는 뜻인데, 토빗 아들의 여행에 동행한다. 라파엘은 사라와 토비야를 서로 만나게 해주고, 마귀의 권세를 꺾는다. 그는 가족의 돈, 특히 토비야의 돈을 안전하게 지켜 주었고, 마침내는 토빗의 시력을 되찾아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천사의 본질과 성격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라파엘 천사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스모대오스 악령과 라파엘 천사에게서 우리는 원초적인 두 세력, 곧 악의 세력과 선의 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선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권능이 항상 창조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사라와 토비야 사라는 라파엘의 도움에 힘입어 행복한 사람을 누린다. 사람들은 사라와 결혼한 남편의 거듭되는 죽음을 부당하게도 사라의 탓으로만 돌렸다. 그러니 누가 그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겠는가? 그에게는 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라구엘이 죽은 다음에는 아무런 보호자 없이 홀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부모 라구엘과 아드나는, 라파엘이 사라를 토비야에게 아내로 맡기라고 청했을 때 기쁜 마음으로 이를 수락했다. 여기서 부모는 큰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의 아버지 라구엘은 사라의 죽은 남편 일곱 명을 무덤에 안장하고 명복을 빈다. 그러나 토비야는 자기 여행에 동행했던 라파엘 천사에게서 마귀를 내쫓는 기적의 도구를 얻었다. 그는 곧 물고기의 간과 염통을 꺼내어 놓고, 라파엘 천사의 말을 기억하면서 당시의 관습대로 그것을 타오르는 향의 잿불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사라를 괴롭히던 마귀가 도망쳤다. 설화는 전반적으로 희극으로 끝난다. 같은 물고기의 쓸개로 토빗은 시력을 되찾는다. 마침내 라파엘 천사는 자기 자신의 정체를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그러자 토빗은 천사를 보내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리고 천수를 누리다가 고령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토비야는 아버지 토빗을 정중하게 무덤에 안장하고, 마찬가지로 안나와 사라의 부모도 정중하게 무덤에 안장한다. 하지만 설화의 소재는 토빗기에서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섭리와 교훈 등에 관한 결정적 진술을 통하여 더 다양해진다. 토비야는 물고기의 내장을 불태움으로써 단순히 마술적 힘을 과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는 신방에 들어갈 때 눈물을 흘리며, 또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토비야가 기도드린 다음에 이 둘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부부로 결합한다. 토비야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하나 되게 창조하신 점을 상기시킨다. “당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닮은 협력자를 우리가 만들어 주자.’ 하셨습니다”(토빗 8,6). 토비야와 사라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혼인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정의롭고 성실한 삶을 살며 그 대가로 행복과 평화를 누린다. 이 얼마나 충만하고 찬란한 이야기인가? 우리는 토비야와 사라의 삶은 참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한 하나의 목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시편 1장과 지혜서가 생명에 이르는 길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여기에서 이렇게 소개할 수 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1-3). 현실에서 하느님의 축복은 동화와 설화의 이야기에서처럼 항상 그렇게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빗기 이야기의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가 안나처럼 사랑하는 자녀와 오랫동안 헤어질 경우, 사라처럼 깊은 절망에 빠질 경우, 아드나처럼 더 이상 희망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경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토빗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쌍백합, 제36호, 2012년 봄호, 김선태 사도요한 신부(화산동 성당 주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