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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필리스티아인들(1사무 4-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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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09 조회수5,029 추천수1

역사서 해설과 묵상 (62) 필리스티아인들(1사무 4-6장) ①

 

 

사무엘기 상권 4-6장은 기원전 1050년경 이스라엘 사람들이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싸우고 갈등을 겪은 내용을 전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벌인 전투에서 패하여 계약궤를 빼앗겼는데,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계약궤 때문에 벌을 받자 돌려주었다는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전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초부터, 곧 이집트 탈출부터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팔레스티나 땅에서 수많은 민족을 만나야 했다. 탈출기 23장 31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이 차지한 땅은 갈대바다에서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바다에 이르는 땅이었다. 그 땅에서 만난 백성 가운데 가장 심각하게 만나야 했던 민족이 필리스티아 사람들이었다. 

 

구약성경 외에서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을 람세스 3세의 비석에 쓰인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비석은 이집트에 쳐들어온 백성의 무리를 언급한다. 기원전 1195년 나일강 델타 지역 전투에서 람세스 3세가 이방민족들을 격퇴시켰다고 한다. 이때 격퇴된 민족의 명단 가운데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미 람세스 2세 때 여기 언급된 민족의 일부가 이집트 편이 되어 기원전 1285년 카데스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의 후계자 메르넵타 제5년에 메르넵타를 거슬러 일어났다. 

 

람세스 3세가 해양민족들을 격퇴한 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오늘날의 팔레스티나 해안에 정착했다. 여기서 이들은 도시 다섯 개를 건설했다. 에크론, 아스돗, 아스클론, 갓, 가자. 이상 다섯 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필리스티아 도시국가가 이렇게 형성되었다. 그래서 후대에 팔레스티나라고 부르게 될 지역에 이들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철기시대의 초기였던 기원전 1200년경부터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는 대결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군사적 대결과는 별도로 성경은 평화적인 관계도 언급한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쇠를 다룰 줄 알았던 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 쇠를 다룰 줄 몰랐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보습이나 곡괭이나 도끼나 낫을 벼리려고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내려가야만 했다.”(1사무 13,20). 텔 엘-파라의 남쪽을 발굴해 보니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12세기에 최초로 쇠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다(W. F. Albright, ‘팔레스티나의 고고학’ 참조). 

 

그러면 필리스티아인은 어디서 온 민족일까? 고고학자들은 팔레스티나의 필리스티아 지역에서 세라믹 물건들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철기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 세라믹 제품들을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세라믹 유물에 새겨진 그림이 주제로 보나 양식으로 보나 후기 미노스 제3기 시대의 크레테 섬에서 나온 그릇들의 그림과 닮았다는 점이다. 미노스는 크레테 섬의 왕 이름이며 동시에 기원전 16-15세기의 크레테 섬에 세워진 왕조를 뜻한다. 에게해 문화를 형성한 미노스 문화는 기원전 1900년경부터 1400년경까지 꽃을 피웠다. 후기 미노스 제3기는 기원전 1400년경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닮은 그림을 보고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미케네 문명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한 역사를 가진 백성의 일부분이다.”(F. Matz, Baden-Baden, 1962년). 이 주장은 어원적인 발견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F. Chabas, Paris, 1873년). “람세스 3세의 비석과 성경에 언급된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그리스의 다양한 역사적 텍스트에 나타나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Pelasges)임이 틀림없다.”(V. Georgiev, 1950년). 

 

기원전 8세기 대 서사시인 호머에 따르면(‘오딧세이’ 19,177), 거룩한 Pelasges가 크레테 섬에서 살았다. 기원전 8세기 예언자 아모스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셨고,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캅토르에서 불러내셨다(아모 9,7). 그러므로 우리는 호머의 자료와 성경의 자료를 연관시킬 수 있고, 캅토르를 ‘크레테 섬’이라고 볼 수 있다. 

 

묵상주제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왔듯이 필리스티아인들도 캅토르에서, 아람도 키르에서 데리고 올라오지 않았느냐”(아모 9,7). [2013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63) 필리스티아인들(1사무 4-6장) ②

 

 

기원전 1195년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람세스 3세에게 패하자 카르멜의 남쪽부터 가자에 이르는 해안 평야지역에 정착했다. 아마도 처음에는 이스라엘 부족들이 점령한 지역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이좋게 살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성경은 판관시대에 단 사람 ‘삼손’이 필리스티아 땅에서 노략질한 기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삼손에 관한 이야기인 판관기 13-16장은 역사적 요소가 가미된 이야기로 구성되었는데, 편집자가 서로 다른 출처에서 온 자료들을 가필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단 지파에 속하는 어떤 마을의 영웅에 관한 사건을 전하는 민속적인 이야기로서, 단 지파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서로 쉽게 왕래하는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삼손이 살았던 초르아(판관 13,2)와 필리스티아 여자를 만나러 갔던 팀나(판관 14,1) 또는 들릴라를 만났던 소렉 골짜기 사이에 경계가 있었다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는다. 

 

역시 판관시대에 삼가르의 이상한 영웅적 행위를 언급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판관기 3장 31절을 보면, 삼가르가 소를 모는 막대기로 필리스티아 사람 육백 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나타났다. 일부 주석학자는 판관으로서 삼가르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고 판관기 5장 6절이 말하는 것처럼 그를 이스라엘의 압제자로 본다. 그 근거로 삼가르라는 이름이 히타이트식 이름이기 때문에 삼가르가 히브리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시에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 이방인식의 이름이 흔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삼손도 이방인식 이름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스라엘을 구한 사람으로서 삼가르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스라엘의 참된 판관이라면 연대기적으로 그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지는 어려운 문제다. 현재의 성경 텍스트는 이 점을 제대로 밝혀주지 않기 때문이다. 삼가르의 행적이 삼손의 영웅적 행동(판관 15,14-15)과 닮았거나 다윗시대의 영웅 아게의 아들 삼마(2사무 23,11-12)와 닮았더라도, 우리는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무찌른 ‘삼가르’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것까지는 없다. 

 

사무엘 시대에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위협이 점점 더 높아졌다. 사무엘기 상권 4장을 보면, 필리스티아 군대가 아펙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군대는 에벤 에제르에 진을 쳤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패하여 하느님의 궤를 빼앗겨 궤는 아스돗에 있는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신 다곤의 성소로 옮겨졌다. 하느님의 궤를 빼앗아 단순한 전리품으로서 다곤 신전에 놓았다는 것은 불충분한 설명이다. ‘궤’는 종교적 상징물이었기 때문에 소중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궤를 자기네들 신전에 놓았을 때 이스라엘의 신이 정복된 신으로서 정복자 다곤 신상의 발밑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대에 백성들 사이의 갈등은 곧 ‘신들의 갈등’이었다. 

 

아펙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무찌른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유다와 에프라임의 여러 도시를 파괴했다. 그 가운데 실로 성소도 포함된다. 덴마크 고고학자들이 옛 실로를 발굴한 결과, 이 도시는 기원전 11세기에 파괴되었고 그 뒤 아주 오랫동안 버려졌다는 것이 드러났다. 기원전 1050년경 실로의 파괴는 사무엘기 상권 4장이 전하는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 필리스티아 지방에서 7개월 동안 머무른 뒤 하느님의 궤는 원래 있던 자리인 옛 부족동맹의 성소 실로에 다시 모셔지지 않고 키르얏 여아림으로 향했기 때문이다.(1사무 7,1) 이것은 실로 성소가 사라졌다는 암시라고 볼 수 있다. 

 

묵상주제 

 

“에훗 다음에는 아낫의 아들 삼가르가 나왔다. 그는 소몰이 막대로 필리스티아인 육백 명을 쳐 죽였다. 삼가르도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판관 3,31) [2013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64) 필리스티아인들(1사무 4-6장) ③

 

 

기원전 1030년경 사울 임금을 중심으로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압박을 거스른 해방전쟁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사무엘기 상권 13-14장은, 정확하게 연대를 설정할 수 없지만 본격적인 전투 이야기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이 전투에서 패했는데, 이 전투는 사울이 행한 최초의 대작전이었고, 사울은 이 전투에서 싸움다운 싸움 없이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들을 적군에게서 구해냈다. 의심할 것 없이 사울의 시대에는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벌이는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1사무 14,52). 그러나 대부분 변방에서 이루어졌다. 

 

사무엘기 상권 17장은 사울 시대에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벌인 전투에 관한 약간 생소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몇 가지 요소를 발견한다. 

 

첫째, 필리스티아 장수가 일대일 전투를 제안했다는 점이다(1사무 17,8-10). 성경은 일대일 전투를 여기 말고도 네 번 언급하는데, 네 번 모두 일대일 전투를 촉발하는 쪽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었다(2사무 21,15-22 참조). 그래서 학자들은 일대일 전투가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통해 서쪽에서 유입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일리아드>에 여러 번 언급된 일대일 전투와 연관 짓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단독 전투의 관습은 이집트에서도 있었고, 아랍 세계에서 계속되었다. 

 

둘째, 다윗의 무장이 필리스티아 장수의 무장과 대조적이라는 점이다. 필리스티아 장수는 투구를 쓰고 비늘 갑옷을 입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투구’와 ‘갑옷’이라는 단어는 외래어며, 또 물건 자체 역시 낯선 것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 시대에 갑옷이나 투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런 장비들은 나중에 아합 시대(1열왕 22,34)와 우찌야 시대(2역대 26,14)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필리스티아 장수가 착용했던 청동으로 만든 정강이받이는 에게해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장비다. 그가 가진 커다란 창은 또 무엇인가? 이것은 북쪽에서 온 침입자들에서 보는 것처럼 창의 일종이다(예레 6,23 참조).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창은 그리스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끝이 둥글고 뾰족하게 생겼다. 사무엘기 상권 13장 19-22절을 보면 사울 시대에 미크마스 전투에서 오직 사울과 요나탄만이 칼과 창을 갖고 있었고, 더구나 히브리 사람들은 쇠를 다룰 줄 몰랐다. 사무엘기 상권 17장 38절에서 보듯이 사울이 다윗에게 청동투구와 갑옷을 입혀주려고 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내용이다. 그러므로 필리스티아 군대의 무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기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고, 더구나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병거까지 갖추고 있었다(1사무 13,5 참조).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흥미있는 이야기는 다윗이 갓의 임금에게 가서 그를 섬겼다는 것이다(1사무 21,11 이하; 27장). 다윗은 갓의 임금 아키스의 식객이 되어 그의 보호를 받았고, 그 반대급부로 그를 섬겼다. 그러나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전투를 재개하자 다윗은 미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슬러 싸우려는 아키스의 군대 일원으로 출정했다가 필리스티아 제후들이 반대하자 치클락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패배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묵상주제

 

“그 당시 이스라엘 온 땅에는 대장장이가 한 명도 없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이 히브리인들에게 칼이나 창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보습이나 곡괭이나 도끼나 낫을 벼리려고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내려가야만 하였다.”(1사무 13,19-20) [2013년 9월 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65) 필리스티아인들(1사무 4-6장) ④

 

 

앞으로 유다와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다윗의 임무는 나라를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서 구해내는 것이 될 것이다. 다윗이 벌인 최초의 군사적 작전은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시기와 여부스족이 살던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전 사이에 위치한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올라와서 르파임 골짜기에서 다윗과 싸움을 벌였다(2사무 5,17-18). 그러나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다윗에게 패하여 그들의 신상들을 내버리고 도망쳤다(2사무 5,19-21). 두 번째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다시 르파임 골짜기로 쳐들어 왔으나 패배하여 게제르까지 도망쳤다(2사무 5,22-25). 그래서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토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다윗이 참으로 필리스티아 영토를 점령했는가?’ 하는 문제다. 

 

아마도 다윗은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군사력을 꺾었을지라도 필리스티아 영토를 정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사무엘기 하권 8장 1절을 보면 다윗이 메텍 암마를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서 빼앗았다고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메텍 암마가 어딘지 분명히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 어디에도 필리스티아를 점령하고 조공을 받았다거나 이스라엘 주둔군을 두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이런 세부사항에 침묵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사무엘기 하권 8장을 보면 다윗이 정복한 모압, 아람, 에돔 같은 나라가 열거되는데, 그들이 어떻게 다윗에게 복속되었는지 자세히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메텍 암마를 정복했다고만 할 뿐 정복과정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는 사무엘기 하권 8장 1절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히브리 사람들과 필리스티아 사람들 사이의 선천적인 적대감은 다윗 시대에 많이 완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다윗은 과거의 적이었던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용병으로 쓰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사무 15,18 이하 참조). 압살롬의 반란 때 갓 사람 이타이가 이끄는 외인부대가 다윗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쳤다. 이처럼 다윗의 부대에는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갓 출신 병사들 600명이 있었다. 

 

다윗의 부대에는 펠렛 외인부대와 크렛 외인부대도 있었다. 펠렛 사람들은 필리스티아인의 한 종족이다. 크렛 사람들은 네겝 사막 남쪽에 정착한 사람들인데 늘 펠렛 사람들과 함께 언급되거나(2사무 20,7; 1열왕 1,38),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병행되어 나타난다(에제 25,16; 스바 2,5). 그러므로 크렛 사람들은 크레테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 같다. 크렛 사람들과 연관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성경에서 캅토르(아모 9,7; 예레 47,4; 신명 2,23)라고 부르는 크레테에서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 가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어쨌든 다윗은 외인부대를 고용함으로써 필리스티아와 가나안의 군주제를 모방했다. 다윗 덕분에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위협이 그 뒤 200년 동안 사라졌고 최소한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는 일은 없어졌다. 물론 남왕국 유다가 기울어 갈 때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나타나 노략질을 했지만, 이스라엘을 압도할 세력은 아니었다. 

 

묵상주제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복수심에 차서 보복하였다. 옛날부터 품어온 적개심으로 다 파괴해버리려고, 악의에 가득 찬 마음으로 복수를 자행하였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손을 뻗어 이 크렛인들을 잘라버리고, 바닷가에 살아남은 자들도 멸망시키겠다. 내가 이렇게 그들에게 분노의 징벌을 내려 크게 복수하겠다. 내가 그들에게 복수하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25,15-17) [2013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66) 필리스티아인들(1사무 4-6장) ⑤

 

 

기원전 933년 솔로몬 왕국의 분열은 단순히 나라의 내적인 일치가 깨진 결과뿐만 아니라, 외적인 안보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 주변의 군소 국가들은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솔로몬 왕국의 분열을 이용했다. 다마스쿠스의 아람 사람들, 암몬과 모압 사람들이 솔로몬의 멍에를 벗어버렸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독립을 얻었다. 그러나 열왕기 상권 15장 27절에 따르면,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경계선에서 기브톤은 놓고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브톤은 게제르와 필리스티아 도시 에크론 사이에 있었다. 

 

한편 기브톤과 게제르, 그리고 갓을 포함한 에크론 지역은 다윗 이후 300년 동안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예루살렘에 있던 노예 두 명이 갓의 왕 아키스에게 달아났다고 말하는 열왕기 상권 2장 39-41절에 근거해 우리는 솔로몬 왕국 초기에 갓이 독립된 도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반세기 뒤 우리는 남쪽과 동쪽 국경선에 요새화된 도시들 가운데 갓을 발견하게 된다(2역대 11,8 참조). 이것은 그 사이에‘이 도시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증거다. 아키스가 다스리던 도시를 이제는 르하브암이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연대를 설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에 그렇게 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이 사건을 열왕기 상권 9장 16절과 연관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구절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가 게제르를 점령했고, 그 다음에 솔로몬과 결혼한 공주에게 결혼 지참금으로 주었다. 이 구절은 이집트 군대가 팔레스티나 해안에 침입했다고 가정하게 이끌어준다. 

 

한편 고고학적 증거도 이 가정을 뒷받침한다. 다니스를 발굴한 결과 이집트 파라오 시아몽의 부조가 발견되었다. 이 부조는 양날 도끼를 손에 쥐고 있는 적을 제압하는 파라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양날 도끼는 셈족의 무기가 아니라 에게해 지역에서 온 무기로서 시리아에 정착한 해양민족들이 즐겨 사용하던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예를 들면 Montet, Paris, 1940년) 이것이 파라오 시아몽이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거둔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열왕기 상권 9장 16절이 파라오에 의해 정복된 다른 도시들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도시들 가운데 갓도 분명히 포함될 것이다. 다른 도시들이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이 구절이 다른 도시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솔로몬에 의해 요새화된 도시들에게만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솔로몬 이후 한 세기 동안 갓은 유다에 속해 있었다. 기원전 820년경 아람 임금 하자엘이 갓을 점령했다(2열왕 12,18). 50년 뒤 유다 임금 ‘우찌야’가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칠 때 갓, 야브네와 아스돗의 성을 헐어버렸다. 그러나 우찌야는 수비가 용이한 요새화된 성을 완전히 없애버리지 않고 아스돗과 필리스티아 지역에 도시들을 세웠다(2역대 26,6 참조). 계속해서 역대기는 하느님께서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치는 유다 임금 ‘우찌야’를 도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찌야는 왜 필리스티아 지역에 쳐들어갔을까? 그 동기는 농업적이고 상업적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찌야는 세펠라, 미솔 그리고 팔레스티나 해안지역에서 농업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고고학자들은 야브네-얌에서 가까운 해안지역에서 농업에 관계된 토기를 발견했는데, 이 토기는 기원전 7세기의 것이다. 이렇게 우찌야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려고 했던 목표는 상업로를 확장하는 것이었다고 추측한다. 그 상업로의 외곽 경계선 가운데 하나가 우찌야가 세운 항구도시 엘랏이었다(2역대 26,2). 

 

묵상주제 

 

“우찌야는 출동하여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워서 갓의 성벽과 야브네의 성벽과 아스돗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러고 나서 아스돗을 비롯하여 필리스티아인들의 지역에 성읍들을 세웠다”(2역대 26,6). [2013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67) 필리스티아인들(1사무 4-6장) ⑥

 

 

기원전 8세기 중엽 우찌야와 동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아모스 예언자는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내리는 예언을 선포했다(1,6-8). 여기서 ‘아모스’는 가자, 아스돗, 아스클론 그리고 에크론만 언급한다. 아모스는 가자 사람들이 죄수들을 에돔에 팔아넘긴 것을 단죄한다. 이것은 가자가 팔레스티나 해안지역 쪽으로 가는 길과 에돔 쪽으로 가는 길 사이의 네거리에 위치한 중요한 상업도시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런데 필리스티아의 다섯 도시 가운데서 갓은 아모스의 멸망선고에 왜 포함되지 않았을까? 갓은 아모스 시대에 유다에 속했기 때문에 아모스의 멸망선고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하즈 시대에 에돔 사람들과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2역대 28,16 이하 참조).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세펠라와 유다 네겝의 도시들에 세력을 뻗쳐왔다. 그들은 벳 세메스, 아얄론, 그데롯, 소코, 팀나, 김조를 점령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이런 공격은 열왕기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역사성이 있다. 왜냐하면 아하즈가 불러들인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 3세(기원전 747-727년)가 가자를 점령했고, 그래서 가자의 임금 하논이 이집트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내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선고(이사 14,28-32)는 기원전 716년경 아하즈 임금이 죽던 해의 것인데, 거기 보면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치던 막대’였던 티글랏 필에세르 3세의 죽음이 암시되었다. 티글랏 필에세르 3세의 죽음은 그의 적들에게 기쁨이 되지 못했다. 그의 후계자는 그보다 더 혹독했기 때문이다. 필리스티아의 사신들이 유다 임금 히즈키야에게 가서 “아시리아 제국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해 조약을 맺자”고 했으나 이사야는 주님만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했다(이사 14,32 참조). 결국 모사를 주도했던 아스돗은 기원전 711년 아시리아의 임금 사르곤 2세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다행히 히즈키야는 이사야의 권고를 따라 필리스티아가 주도한 반 아시리아 제국 투쟁에 가담하지 않은 덕분에 남왕국 유다는 아시리아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다. 

 

아모스와 이사야의 뒤를 이어 많은 예언자가 필리스티아에 독설을 퍼부었다(스바 2,4-7; 예레 47,1-7: 에제 25,15-17; 요엘 4,4-8). 예레미야 예언자는 필리스티아 도시 가운데서 가자와 아스클론만을 언급한다(예레 47,5.7). 여기서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군대의 도착은 북쪽에서 오는 홍수에 비유되며, 모든 필리스티아 도시가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예레미야서 47장 5절을 보면 아스클론이 이미 폐허가 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기원전 604년 네부카드네자르가 이 도시를 점령한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에제키엘 예언서에도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내리는 선고가 있다(에제 25,15-17). 여기서는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남왕국 유다에게 가혹하게 행한 복수심이 문제가 된다. 우리는 이 구절이 정확하게 어떤 사건을 암시하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포위되었을 당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한 행동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에돔 사람들처럼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바빌론 군대를 도와주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기원전 400년경 활동한 요엘 예언자가 티로와 시돈과 더불어 필리스티아 지역을 언급한다. 요엘은 그들이 유다인 노예들을 그리스 사람들에게 팔아넘겼다고 그들을 고발한다(요엘 4,6). 노예매매에서 페니키아 사람들과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이런 연합은 페르시아 제국 시대의 관습이다. 

 

묵상주제 

 

“티로와 시돈아 그리고 필리스티아의 모든 지방아, 너희가 나에게 무엇을 하려느냐? 무슨 보복이라도 하려느냐? 너희가 나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면 나는 곧 지체없이 너희의 행실을 너희 머리 위로 되돌리리라”(요엘 4,4). [2013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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