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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성경 여행: 야고보 서간: 신앙의 실천 - 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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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09 조회수2,785 추천수1

[성경 여행] 야고보 서간 3 : 신앙의 실천 - 재물



1. 새로운 이스라엘

야고보서는 서두에서 이 편지의 수신자들을 가리켜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1,1)라고 부릅니다. 열둘이라는 상징적 의미는 곧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분명히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해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문자적인 의미의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새 이스라엘’, 즉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신약성경은 바로 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이 영원한 하늘 나라를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 유배민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자각을 드러냅니다(cf. 필리 3,20; 1베드 1,1; 2,11; 히브 11,13; 13,14). 야고보서는 새 이스라엘이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시련”(1,2.12)이라 진단합니다. 그러므로 시작에서 마침에 이르기까지 “인내”(야고 1,3.4.12; 5,11)라는 주제가 전체 서간을 지배합니다.


2. 시련과 인내

교회가 직면한 시련은 내적, 외적 시련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외적으로는 유다인들, 혹은 로마 제국에 의한 박해를 첫째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외적인 시련인 박해 상황보다 더 치명적인 시련은 교회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사도행전 6,1-7의 일화가 들려주는 것처럼 교회는 끊임없는 갈라섬의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빵의 분배 문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 지역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문제(사도 11,1-18; 15,1-35 참조), 혹은 선교의 협력자로서의 자질과 같은(사도 15,39 참조) 매우 사소한 문제까지도 갈등의 원인으로 등장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갈등과 반목, 분열의 위기 속에서 성장을 거듭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어떻게 그러한 교회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성장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자칫 소수의 목소리를 무시한 획일적인 일치는 그 과정에서 편견과 소외라는 부작용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의 모습은 친교의 공동체가 아닌 억압과 독재, 획일화가 판을 치는 집단일 뿐 건강하게 성장하는 하느님 백성의 통교의 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른 의견들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지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성령께서는 각 지체들을 통해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야고 3,16-17).


3. 재물

갈등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제시되는 것이 재물에 관한 문제입니다. 야고보서가 재차 반복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재물”과 그것과 관련된 처신으로, 재물 그 자체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태도”에 더 집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야고보서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1,12)을 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는 일”(1,20)이며, 세례를 통해 얻게 되는 “존귀한 이름”(2,7)에 걸맞는 삶의 지표입니다.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재물에 대한 전통적인 사상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재물은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대표적인 “선물”입니다. 따라서 의인들은 하느님의 재물을 통해 그 의로움에 대한 보상을 얻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느님의 자리에 “재물”이 놓이거나, 재물을 믿고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 혹은 부당한 수단으로 재물을 모으는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신명 8,12-14; 호세 13,6; 잠언 10,15 참조).

지금도 그렇지만 빈부의 격차는 인간에 대한 차별로 나타납니다. 초세기 교회 역시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던 듯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야고 2,5-6).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은 부자들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 스스로가 다른 형제들의 부족함을 업신여기고 그들과의 연대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굴종적이면서도 자기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거나, 그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매몰찬 사회. 그것이 정치 권력이든, 경제 권력이든, “형제를 헐뜯거나 자기 형제를 심판하는 자는 법을 헐뜯고 심판하는 것이며, 법을 심판하는 것은 법을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의 심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한 분이신 “입법자요 심판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올려놓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야고 4,11-12).

[2014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가톨릭교리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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