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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27: 벳자타 못과 실로암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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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12 조회수5,399 추천수1

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7) 벳자타 못과 실로암 못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두 가지 치유 이야기가 전해진다. 요한 5,1-18은 벳자타 못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이고, 요한 9,1-12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이다. 이 두 치유 사건은 예루살렘의 두 지명, 곧 벳자타 못과 실로암 못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두 곳의 공통점은 물과 관련된 못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 두 못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보자.


1. 벳자타 못

현재 예루살렘 구시가(Old City)의 동쪽 성벽에는 성 스테파노의 문이 있다. 이 성문은 “사자의 문”, “양 문”(Sheep Gate, 느헤 3,1), “안나의 문”, “마리아의 문”이라고도 불린다. “안나의 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안나의 집이 성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 스테파노의 문 근처에는 성 안나 성당(Church of Saint Anne)이 있다. 비잔틴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의 집터에 경당이 세워졌다. 이 성 안나 성당 바로 옆에 요한 5장의 치유 사건이 일어난 벳자타 못(Pool of Bethzatha)이 있다. 좌우 두 개의 못으로 이루어진 벳자타 못은 가로 50m, 세로 150m, 깊이 15m 가량이었다.

기원전 8세기에 빗물을 저장하기 위해 둑이 만들어졌는데 이사 7,3; 2열왕 18,17에서 “윗저수지”로 소개된다. 이 저수지의 물은 바위를 깎아 만든 수로를 통해 다윗 성 안으로 흘렀다. 기원전 200년경에 대사제 시몬은 이 수로를 터널로 바꾸었다. 시몬은 예루살렘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기존의 둑 남쪽에 두 번째 못을 만들어 쌍둥이 못을 건설하였다. “오니아스의 아들 시몬은 대사제로서 생전에 주님의 집을 수리하고 자기 생애에 성전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안뜰의 높은 벽의 기초를 놓았고 성전을 둘러싸는 담을 높이 쌓아 올렸다. 그는 자기 생애에 저수 동굴을 팠는데 그 웅덩이 둘레는 바다 같았다.”(집회 50,1-3)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못의 동쪽에 있던 자연 동굴들은 목욕 시설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역할뿐 아니라 병을 고치기 위한 기능도 하였다. 사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았다. 쌍둥이 못은 사용되지 않았는데, 헤로데 대왕이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동물들을 씻는 이스라엘의 못(Pool of Israel)을 성전 근처에 만들었다.

현재 예루살렘 신시가(New City)의 남서쪽에 위치한 홀리랜드 호텔(Holyland Hotel)에는 제2성전(Second Temple) 시대의 고대 예루살렘 모형이 있다. 이곳에서 두 개로 이루어진 당시 벳자타 못의 모형을 확인할 수 있다.

요한 5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 뒤에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1-3절) 벳자타라는 이름은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을 의미하는데 치유의 성소에 적합했다. 벳자타 못에서 예수님은 서른여덟 해나 앓던 병자를 고쳐 주셨다. 요한 복음서에서 언급된 다섯 주랑을 확인한 이는 오리게네스(231년경)였다. 그는 쌍둥이 못에서 가장자리의 네 주랑과 가운데의 한 주랑을 언급하면서 요한 복음서의 다섯 주랑과 처음으로 연결하여 소개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벳자타 못의 주랑을 보았는지는 의심스럽다.

5세기 중반에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기념하는 경당이 세워졌다. 이 경당은 615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009년 칼리프 알-하킴(al-Hakim)이 그리스도교 성지를 파괴한 이후, 십자군 시대에 이 폐허 위에 다시 성당이 세워졌다. 성 안나 성당은 웅장한 로마네스크식으로 성모 마리아의 집터에 세워졌다. 1192년 7월 25일에 살라딘은 이 성당을 이슬람 종교 학교로 바꾸었다. 1856년에 오스만 터키 제국은 크림 전쟁 때 지원해 준 프랑스에게 감사의 의미로 성 안나 성당을 선물하였다.


2. 실로암 못

키드론 계곡의 기혼 샘(Gihon Spring)은 예루살렘 초기 정착 시기부터 유일한 물 공급원이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기혼 샘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다.(1열왕 1,45) 기혼 샘의 물을 실로암 못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히즈키야는 터널을 만들었다. “기혼 샘의 위쪽 물줄기를 막아 다윗성 서쪽 밑으로 돌려 끌어들인 것도 바로 히즈키야이다.”(2역대 32,30) “히즈키야의 나머지 행적과 그의 모든 무용, 그리고 그가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도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일에 관해서는 유다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2열왕 20,20) 히즈키야 터널(Hezekiah’s Tunnel)은 전체 길이가 약 512m이다. 평균 폭은 60cm, 높이는 1.45-5m에 이른다. 물의 깊이는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20-80cm이다.

실로암 못(Pool of Siloam)은 이사 8,6에서 “잔잔히 흐르는 실로아 물”로 묘사된다. 요한 9장에서 예수님은 눈먼 이를 고치시는데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7절) 루카 13,4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전한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실로암 못의 초기 형태는 역사 속에 이미 사라졌다. 아마도 헤로데 대왕이 예루살렘 건설의 큰 계획을 세웠을 때 실로암 못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 실로암 못의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다음날 로마 군대는 강도들을 하부 도시에서 몰아내고 실로암 지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불태웠다. 로마 군대는 도시가 불타는 광경을 보고 기뻐했지만 약탈할 것이 없어 실망했다. 저항군이 상부 도시로 달아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유다 전쟁사』 6권 363)

보르도(Bordeaux) 순례자들(333년)의 기록에 따르면, 실로암 못에는 네 개의 주랑이 있었는데,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이것은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된 못을 가리킨다. 실로암 못은 요한 9장의 치유가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을 순례하였다. 실로암의 첫 성당은 450년경에 황제의 부인인 에우도키아(Eudokia)에 의해 세워졌다. 고고학적 발굴은 570년경의 피아첸차(Piacenza) 순례자가 묘사한 “사람들은 여러 계단으로 실로암까지 내려간다. 실로암 위에 큰 성당이 있는데, 그 아래로 실로암의 물이 솟아오른다.”라는 기록을 입증하였다. 실로암의 성당은 614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런데 실로암 물의 치유 능력에 대한 믿음은 비잔틴 순례자들에 의해 강조되었고, 아랍인들에게도 계속되었다. 여러 문헌들은 실로암 못 주위의 주랑이 15세기까지 있었다고 암시한다. 1890년대에는 실로암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3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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