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1열왕 19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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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09-09 | 조회수3,210 | 추천수1 | |
역사서 해설과 묵상 (106)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1열왕 19장) 1
기원전 9세기 아합 임금시대에 활동한 엘리야는 세라핌 천사처럼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불타는 정열적인 예언자였다.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과 카르멜산에서 대결을 벌여 그 예언자들을 모두 학살하자 아합 임금의 부인 이제벨이 엘리야 예언자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그대의 목숨을 그들의 목숨과 한가지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벌을 내리고 또 내릴 것이오.”(1열왕 19,2). 이제벨의 이 말에 엘리야는 목숨을 구하려고 호렙산으로 도망쳤고, 거기서 하느님을 체험했다.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가는 엘리야 예언자의 여행을 이야기하는 열왕기 상권 19장은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을 말한다. 이 텍스트는 하느님의 발현(1열왕 19,11-12)을 서술한다. 이 서술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에서 그 증인이 된 하느님 발현(탈출 19-20장)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특별히 원초적인 하느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탈출기 19-20장에서 하느님은 소리, 번개와 구름이 어우러진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때 시나이 산은 온통 연기가 자욱하였다. 주님께서 불 속에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마치 가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연기가 솟아오르며 산 전체가 심하게 뒤흔들렸다. 뿔 나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세가 말씀을 아뢰자, 하느님께서 우렛소리로 대답하셨다.”(탈출 19,18-19). 신명기 5장 3-5절과 23-27절은 몇 가지 다른 점을 빼고는 근본적으로 탈출기 19장의 전통을 다시 인용한다. 탈출기 19장에서 하느님의 발현은 요란한 소리와 우주적 힘의 과시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반면에 열왕기 상권 19장에는 조용한 소리를 듣는 것이 요점이다. 이런 대조는 이 두 텍스트의 차이점을 가정한다.
히브리어 마쏘라 텍스트는 열왕기 상권 19장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곧 19장 1-14절, 15-18절, 19-21절로 구분한다. 이런 구분은 유다교 회당에서 행하던 독서형태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여기서 셋째 부분(1열왕 19,19-21)은 앞의 두 부분과 확연히 구별된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하느님의 산으로 가는 엘리야의 여행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의 첫 만남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앞의 두 부분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19장 15절부터는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는데, 앞의 내용과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가 히브리어 마쏘라 텍스트의 구분에서 취해야 할 것은 19장 1-18절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동일한 문학적 단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왕기 상권 19장 1-18절에 한정해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을 살펴볼 것이다.
내용으로 볼 때 열왕기 상권 19장 1-8절은 호렙으로 가는 엘리야의 여행이다. 그런데 이 여행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가? 북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가 남왕국 유다로 출발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 대답은 생각만큼 그리 간단하지 않으며, 여기서 19장 1-3ㄱ절과 3ㄴ-8절을 구분해야 한다.
19장 1-3ㄱ절은 바알의 예언자들을 학살한 것을 이야기하는 열왕기 상권 18장과 연관 짓는 서론이다. 이 서론은 엘리야의 여행이 이 예언자를 죽이려하는 여왕 이제벨에게서 도망치는 것임을 알려준다. 하느님 앞에서 굳건했던 엘리야 예언자가 한 여인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었다. 엘리야의 반응은 여왕에 의해 발설된 죽음의 위협과 잘 맞아 떨어진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목숨을 건지려고 북왕국에서 도망쳤던 것이다.
이 서론부는 인위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모아서 엘리야 자료의 최종적인 형태를 결정한 편집자의 작품이다.
묵상주제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2014년 9월 7일 연중 제23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07)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1열왕 19장) 2
열왕기 상권 19장 3ㄴ절부터 엘리야의 여행은 낙담과 삶을 포기함이 특징이다. 그는 유다 남쪽 도시 브에르 세바에 시종을 남겨두고 혼자 하룻길을 걸어 광야로 들어가서 죽기를 간청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1열왕 19,4).
이런 태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예언사명’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엘리야는 혼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의 예언선포를 거부하는 사회 안에서 유일한 주님의 추종자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죽고 싶다는 그의 소망을 열왕기 19장 10절과 14절에 두 번이나 언급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소행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독자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는 여행에서 예언사명의 실패로 낙담한 엘리야가 스스로 택한 여행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우리는 여기서 처음 서론부(1열왕 19,1-3ㄱ)에서 설정한 목적과 차이가 나는 점을 발견한다. 서론부는 엘리야가 목숨을 구하려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 사실은 19장 3ㄱ절에서 강조되었다. 그런데 19장 4절에서 엘리야는 하느님께 자기를 죽여달라고 청한다.
19장 3ㄴ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엘리야가 유다 땅 브엘세바에 도착했다고 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곧 엘리야는 자신의 예언사명 장소인 북왕국을 버렸다는 것이다. 더욱이 남왕국 유다의 남부지역 끝단에 있는 중요한 도시 브에르 세바에 와서 거기다 시종을 남겨놓았다.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하루 종일 걸어서 사막으로 들어가 외따로 싸리나무 아래에 앉는 것으로 여행을 마쳤다. 이런 모든 상세한 묘사는 독자들에게 다음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곧 엘리야는 홀로 있는 고독한 인간이요 낙담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낙담했다는 것은 하느님께 죽여달라고 요구한 데서 드러난다. 그의 낙담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서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1열왕 19,4)라는 말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여기서 ‘조상들’이라는 단어는 하느님께 불평해서 바로 이 장소에서 죽은 과거 광야의 세대를 뜻하는 것 같다(민수 14,22-23 참조). 엘리야 예언자는 자신을 그 세대와 같은 위치에 놓고, 그들과 똑같은 운명을 요구했다.
19장 5절부터 이야기는 두 개의 장면으로 전개된다. 이 두 개의 장면은 겉으로는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첫째 장면(1열왕 19,5ㄴ-6)에서 한 천사가 잠들어 있던 엘리야를 깨워 그에게 먹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사막에 기적처럼 나타난 음식이 그의 머리맡에 있었다. 이런 기적은 엘리야의 말에 대한 반응이다. 삶에 지치고 사회에 염증을 느낀 엘리야라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죽지 말라고 명령하시는데, 그의 머리맡에 놓인 음식은 바로 그런 명령을 뜻한다. 이 첫 장면은 19장 3ㄴ-5ㄱ절과 한 덩어리를 이룬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춰야 정상이고, 아마도 원래는 그랬을 것이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전한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둘째 장면(1열왕 19,7-8)은 다른 의미가 있으며 이야기를 다시 용솟음치게 한다. 엘리야는 다시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어났다. 이번에도 주님의 천사가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명령의 동기가 제시된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1열왕 19,7). 엘리야는 명령에 복종했다. 텍스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열왕 19,8).
이처럼 엘리야의 여행은 시나이 산의 순례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 그런 식으로 순례했다는 증거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걸어간 기간은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40주야’라는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 체류한 40년을 암시하고(민수 14,32-34. 신명 8,2-4), 특별히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보낸 40주야를 암시하기 때문이다(탈출 24,18). 엘리야가 40주야를 걸어 하느님의 산으로 갔다는 것은 엘리야와 모세의 유사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묵상주제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늘을 닫아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집회 48,3). [2014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08)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1열왕 19장) 3
열왕기 상권 19장 9절에 이르러 독자들은 이미 잘 알려진 곳으로 가정하는 하느님의 산에 엘리야가 도착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가 거기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엘리야야,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1열왕 19,9). 이 질문에 엘리야는 깊은 탄식으로 대답했다(1열왕 19,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 19,11). 이 명령은 19장 13절에 가서야 비로소 실행되었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1열왕 19, 13).
하느님의 명령과 엘리야의 실행 사이에 독특한 하느님 발현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대화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19,9). 반면에 두 번째 대화는 내용은 같지만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19,13). 서로 병행되는 것 말고도 놀라운 사실은 말하는 분의 정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이미 확인된 주어의 정체로부터 누군지 모르는 목소리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열왕기 상권 19장 9-10절은 13-14절보다 후기의 것임이 분명하다. 열왕기 상권 19장 9-10절을 후기의 것으로 보는 우리의 가정은 열왕기 상권 9장 15절에서 비로소 분명히 밝혀지는 목소리의 정체를 익명으로 표시하는 19장 13-14절이 더 원초적이라고 믿는 데 근거한다.
열왕기 상권 19장 11절에서 그분이 명령을 내렸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이렇게 말하는 분이 주님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첫눈에 알 수 있다. 만일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면 3인칭 단수가 아니라 1인칭 단수 형태가 되어야 한다. 곧 “나와서 내 앞에 있는 산 위에 서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어서 하느님께서 지나가심을 묘사하는데, 그 내용이나 성격이 아주 독특하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하느님 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엘리야는 그 증인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백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열왕기 상권 19장 11절에 따르면 하느님의 지나가심은 엘리야가 산 위에 섰을 때 이루어져야 하는데, 엘리야는 19장 13절까지 계속해서 동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장 11절의 명령과 13절의 실행 사이에 발현 이야기가 있는데, 내용은 엘리야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일종의 묘사다. 이런 상황은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사실을 말하자면, 열왕기 상권 19장 11-12절은 그 형태로 볼 때 하느님의 현존양식에 조심과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자연적 현상을 통해 나타나신다는 사고방식에 대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바람, 지진, 불이라는 세 번에 걸친 자연현상을 묘사한 뒤에 세 번이나 강한 부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의 연속은 아주 인상적이다.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이처럼 열왕기 상권 19장은 서술체의 형태로 ‘부정신학’(否定神學)을 전개한다. 이런 부정신학은 자연적인 힘과 연관된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전통적 믿음을 배경으로 한다.
묵상주제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집회 48,4). [2014년 9월 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09)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1열왕 19장) 4
열왕기 상권 19장은 세 번에 걸친 부정 뒤에야 비로소 긍정문을 제시한다. “불이 지나간 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2). 여기서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다음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곧 하느님의 지나가심은 ‘조용한 침묵의 소리’가 지나가심이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연적 힘과 그 정체를 밝혀내야만 하는 어떤 소리의 연약함 사이에 대조가 설정되었다는 역설에 직면한다. 열왕기 상권 19장 12절은 그 소리 안에 주님께서 계시다고 명백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 다음 이야기는 그 소리의 정체를 분별해야만 하는 엘리야의 체험을 말한다. 그러므로 열왕기 상권 19장 11-12절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발현이 아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의 현존양식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열왕기 상권 19장 11-12절을 이렇게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의 실행이 늦어진 이유가 설명될 수 있고, 조심성을 환기시키는 이 텍스트의 위치가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뒤따라오는 내용과 비교해 볼 때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우리는 여기서 첫 번째 대화(1열왕 19,9-10)를 이차적인 자료로 간주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첫 번째 대화는 이미 그 소리의 정체를 파악한 것을 전제로 하고 그 소리가 ‘주님의 말씀’이라고 못 박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이 구절이 뜻하는 바를 알고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안 열왕기 상권 19장 11-12절은 ‘하느님 발현 이야기’라고 간주되어왔는데, 사실은 하느님 발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첫째, 세 가지 자연현상은 ‘주님 앞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이런 현상은 하느님의 지나가심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본다’는 동사가 하느님 발현 이야기에 반드시 등장하는데(창세 18,2; 탈출 20,18 참조), 열왕기 상권 19장 11-12절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엘리야는 아무 것도 보지 않았고 다만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들었던 것은 명령을 내리는 소리(1열왕 19,11)였고, 침묵 가운데서 울리는 소리였다(1열왕 19,12). 끝으로, 이 텍스트가 전개하는 이야기의 논리를 억지로 하느님 발현 이야기로 귀결시킬 수 없는 이 텍스트 고유의 성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열왕기 상권 19장 1-14절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19장 11절에서 소리가 내리는 명령과 19장 13절 엘리야의 실행 사이에 있는 하느님의 발현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열왕기 상권 19장 11-12절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발현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하느님의 발현에 대한 조심과 경계라고 보아야 한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사상에 나름대로 견해를 제시한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산에서 자연적인 현상이 수반된 가운데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고 생각했다(탈출 19-20장 참조). 다시 말해, 자연적인 현상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알려주고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열왕기 상권 19장 11-12절은 하느님께서는 이런 자연현상적인 힘의 수반이 없는 가운데서도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전통에 의해 제시된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도 하느님께서는 현존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전통에 나름대로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묵상주제
열왕기 상권 19장에서 엘리야가 체험한 하느님의 지나가심은 시각적 요소가 특별히 강조된 탈출기 19장의 전통적인 하느님 발현과 일치하지 않고, 카르멜산 위에서 제사 때 ‘주님의 불’(1열왕 18,38)이 내려왔던 엘리야의 체험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열왕기 상권 19장은 전혀 다른 하느님 체험이다. 이것은 자연현상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 체험한 것이고, 하느님의 소리인 ‘조용한 침묵의 소리’(1열왕 19,12)를 듣는 체험이다. 그러므로 열왕기 상권 19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언적인 체험 곧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체험이다. [2014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10)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1열왕 19장) 5
“엘리야야,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1열왕 19,13)라는 소리의 질문에 예언자는 항의하는 투로 답변했다. ‘여기’라는 단어는 유다를 뜻할 수도 있고(1열왕 19,3) 하느님의 산이 있는 사막을 뜻할 수도 있는데(1열왕 19,4), 이 단어는 엘리야가 정상적으로 예언활동을 하는 장소인 북왕국 이스라엘과 멀리 떨어진 곳이다. 지금 엘리야는 남쪽 사막에 있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더구나 그는 죽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그 소리에 의해 제기된 질문은 분명히 견책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엘리야가 소명의 자리를 버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엘리야는 열왕기 하권 10장 16절에서 예후가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을 위한 열성에 불타서 항의한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해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습니다”(1열왕 19,14).
엘리야는 주님을 위한 자신의 열정과 야훼 추종자로서의 고독을 동시에 긍정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이 장소에 왜 와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엘리야가 하느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구하는 열왕기 상권 19장 4절부터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해야 한다. 열왕기 상권 17-18장에서 보듯이 확신과 능력에 차서 활동했던 엘리야가 이제 와서 그런 확신과 능력을 잃어버린 듯 보인다. 그는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떠났다. 엘리야에게 있어 하느님은 죽여 달라고 청하는 대상일 뿐, 더는 생명과 능력의 하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엘리야야,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1열왕 19,13)라는 소리의 질문에 예언자는 항의하는 투로 답변했다. ‘여기’라는 단어는 유다를 뜻할 수도 있고(1열왕 19,3) 하느님의 산이 있는 사막을 뜻할 수도 있는데(1열왕 19,4), 이 단어는 엘리야가 정상적으로 예언활동을 하는 장소인 북왕국 이스라엘과 멀리 떨어진 곳이다. 지금 엘리야는 남쪽 사막에 있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더구나 그는 죽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그 소리에 의해 제기된 질문은 분명히 견책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엘리야가 소명의 자리를 버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엘리야는 열왕기 하권 10장 16절에서 예후가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을 위한 열성에 불타서 항의한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해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습니다”(1열왕 19,14).
엘리야는 주님을 위한 자신의 열정과 야훼 추종자로서의 고독을 동시에 긍정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이 장소에 왜 와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엘리야가 하느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구하는 열왕기 상권 19장 4절부터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해야 한다. 열왕기 상권 17-18장에서 보듯이 확신과 능력에 차서 활동했던 엘리야가 이제 와서 그런 확신과 능력을 잃어버린 듯 보인다. 그는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떠났다. 엘리야에게 있어 하느님은 죽여 달라고 청하는 대상일 뿐, 더는 생명과 능력의 하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묵상주제
엘리야 예언자는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될 때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다(1열왕 17-18장 참조). 그러나 그는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낙담과 좌절과 실패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했다(1열왕 19장 참조).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은 계속된다. [2014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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