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질투하시는 하느님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구약] 소예언서 읽기: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호세 11,8)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4-10-04 | 조회수3,810 | 추천수2 | |
그레고리아의 ‘하느님, 질문 있어요!’ (1) 질투하시는 하느님
“질투는 인간의 감정 중 가장 낮은 쪽에 속하는 치졸하고 유치한 감정입니다. 상대방의 애정이 다른 사람에게 향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비롯된 감정이니까요.”
한동안 우리나라 여성들의 혼을 쏙 빼놓았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나온 대사 일부다. 이 대사를 한, 이 땅에서 400년을 살았다는 주인공 역시 사랑에 빠지면서 질투하는 모습으로 시청자에게 잔잔한 재미를 주었다. 사실 드라마나 소설 등 인간사를 다룰 때 질투는 매우 중요한 소재가 된다.
일상생활에서 상당히 늦 터진 나는 서른이 되도록 ‘질투받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때까진 그래도 부모님, 선생님 등 웃어른들로부터 비교적 인정받는 편이어서 주변의 질시를 받는 입장일 때가 가끔 있었고, 그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 서른이 되자 ‘질투하는 고통’을 알게 되었다. 그건 질투 받아서 겪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4세기의 교부 성서 해석학자이자 유명한 강론가였던 크리소스토모스 성인은 “좀이 옷을 먹는 것같이 질투는 사람을 먹어 버린다.”고 했다. 그리고 16세기 화가 아뇰로 브론치노는 ‘비너스와 큐피드의 알레고리’라는 작품에서 큐피트 날개 밑에서 숨죽이며 울부짖는 남자의 모습으로 질투하는 사람의 고통을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아무튼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질투가 썩 아름답거나 바람직해 보이지 않을진대, 성경에서 하느님이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느님’이라 한 건 참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 쉽지 않다.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 ‘거룩하신 하느님’. 이 얼마나 멋진 하느님의 모습인가. 그런데 ‘질투하는 하느님’이라니, 참 민망하다. 우리가 결코 좋아할 수 없는 하느님 이름이다.
십계명의 출처인 탈출기 20장 1-6절에서도 하느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느님’이라 소개한다. 그중 특히 5절이 최악이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탈출 20,5)
무시무시한 질투의 화신 같다. 내용이나 말씀하시는 법이 하느님치고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타락한 신들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따르며 흠숭하는 지극히 윤리적이신 유일신 하느님께서 어찌 보통 사람들도 말하기 꺼리는, 그런 치졸한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하시는지?
사실 하느님 앞에는 어떤 형용어가 붙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어떠한 언어로도 규정짓거나 한계 지을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라는 형용어를 붙여 그분을 소개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우리 인간을 이해시키려는 그분의 의도 때문이다. 탈출기 20장 5절에서 하느님 스스로 질투하는 하느님이라고 소개한 이유는 바로 앞 구절인 4절과 5절의 앞부분에 숨어 있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탈출 20,4-5)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나아가 우리 모두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을 제대로 지키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스스로를 ‘질투의 화신’이라고 소개하신 것이다. 도대체 우상이 무엇이기에 하느님답지 못하다는 오해를 받아가면서까지 사람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 하느님께서 고대 근동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잡신들이 당신보다 더 위대해질까 봐 두려우셨단 말인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고대 근동의 잡신들에게 빼앗기게 될까 봐 두려우셨던 것일까? 그럴 리가!
우상은 어떤 이름을 지녔든 어떤 모습을 지녔든 사람이 만든 것이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우상을 섬길 때, 진짜로 섬기고 숭배하는 것은 우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우상을 섬기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명예, 자신의 탐욕, 자신의 지위 등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상을 섬길 때, 결국 사람은 타락하게 되고 사람답지 못한 삶을 살게 된다. 하느님은 그걸 보실 수 없으신 것이다. 우리 모두를 당신 분신으로 여기시는 사랑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까지 세상에 보내실 수밖에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질투는 하느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사랑의 파생물이다. 질투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이자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능동적 관심을 강조하는 말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도 없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질투하신다. 무엇보다 사람에게 위험한 것이기에 질투하신다. 질투하는 하느님은 곧 사랑하는 하느님이시다.
[평신도, 제43호(2014년 봄), 송향숙 그레고리아(가톨릭출판사 편집국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