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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엘리야의 승천(2열왕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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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11-04 조회수3,554 추천수1

역사서 해설과 묵상 (113)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2열왕 2,11)

 

 

열왕기 하권 2장은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이야기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에녹과 엘리야가 승천했다. “에녹은 모두 365년을 살았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세 5,23-24). 열왕기 하권 2장 역시 엘리야의 승천을 말한다.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2열왕 2,11). 이처럼 승천은 하느님과 함께 불꽃처럼 살다간 사람에게 따르는 보상으로 나타난다.

 

샤를 드 푸코(Chales de Foucauld 1858-1916) 신부님은 20세기를 빛낸 인물로 꼽힌다. 그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78년 소위로 임관했다. 그러나 군대생활이 맞지 않음을 깨닫고 제대하여 1883년부터 2년 동안 모로코를 탐험했다.

 

푸코는 사하라 사막에 머물 때 느낀 고독과 무슬림의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아 1886년 10월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에 가서 앙리 위블랭(Henri Hublin) 아빠스에게 고행성사를 보고 깊이 회개했다. 이때를 회고하며 푸코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게 된 순간, 나는 오로지 그분만을 위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인 푸코는 이때부터 기도와 금욕의 삶을 시작했으며, 1890년 이스라엘 나자렛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했다. 1901년 프랑스로 돌아와 사제품을 받았다. 곧이어 모로코와 알제리 국경 근처 베니 수도원의 은수처로 들어갔다. 그는 사하라 사막의 무슬림 부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그 방법은 설교가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말이 아니라 거룩한 성사와 희생의 봉헌과 기도와 참회와 복음삼덕의 실천과 형제적이고 보편적인 사랑, 마지막 한 조각까지 모든 가난한 이, 모르는 이들과 빵을 나누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임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1905년에는 사하라 사막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알제리 남부 도시 타만라세트 근처 아하가르 산 정상에 거친 돌집을 지은 다음, 그곳에서 11년 동안 투아레그 부족과 함께 살았다. 1916년 프랑스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푸코 신부님은 사누시파 무슬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푸코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머물려고 30년 동안 노동과 기도 속에서 살았던 나자렛의 삶을 재현하는 것을 영성의 출발점으로 삼아 가난하고 평범하게 살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랍인 복장을 하고 오두막에 살면서 단순히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깨닫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기뻐했다. ‘예수님, 사랑’ 이 두 단어가 그의 좌우명이었다. 생전에 푸코 신부님은 제자들을 두지 않았지만, 그의 영향으로 ‘예수의 작은 형제회’와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전교회’가 설립되어 전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가난의 삶을 나누고 형제애를 증거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여기서 불은 신자 공동체에 작용하는 성령(R. Bultmann)이라고 볼 수 있다. 변화의 주체는 인간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종교나 제도라할지라도 의미가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변화의 불이다. 그런 변화의 불을 먼저 내 안에서 일으키라는 것이다.

 

프랑스 귀족가문 출신으로 신앙에 무관심하고 세상 부귀영화와 쾌락을 좆던 샤를 드 푸코는 성령의 불로 세례를 받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다. 이러한 푸코 신부님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열정적으로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자.

 

묵상주제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게 된 순간, 나는 오로지 그분만을 위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샤를 드 푸코). [2014년 11월 2일 위령의 날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14)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집어 들고 되돌아와 요르단 강 가에 섰다”(2열왕 2,13).

 

 

엘리사라는 이름은 ‘나의 하느님은 구원이다.’는 뜻이다. 열왕기 하권 2-13장은 엘리사 이야기로서 엘리야 전승과는 독립적이다. 따라서 동일한 저자가 엘리야 이야기와 엘리사 이야기를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전승이 동일한 환경에 속하는 것은 틀림없다.

 

엘리사 이야기는 주로 정치적 상황에서 하느님이 예언자를 통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보여준다. 신명기 학파의 역사가는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병거요 기병’(2열왕 13,14)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활동기간은 기원전 850-800년 사이로 추정한다.

 

열왕기 하권 2장은 엘리야의 승천을 전하는 이야기지만 사실은 엘리사 이야기의 시작이다. 엘리야 자료는 열왕기 하권 1장 엘리야 예언자와 아하즈야 임금의 마지막 대면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열왕기 하권 2장에는 전설적인 요소가 많다. 외투로 강을 쳐서 강물을 가르고, 불 말과 불 병거가 나타나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예언자의 명령에 숲 속에서 곰이 나오고, 오염된 샘물이 깨끗해졌다. 이야기의 전개도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떼어놓으려고 숨바꼭질하듯 요르단 강 근처 길갈에서 시작해 엉뚱한 곳을 헤매다가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왔다. 그리고 엘리사는 수련생들에게 엘리야의 승천사실을 숨겼다. 수련생들은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려고 사흘을 헤매고 다녔지만 허탕을 쳤다.

 

엘리사는 승천을 앞둔 엘리야에게 장자의 몫을 청했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주십시오.”(2열왕 2,9). 신명기법에서 장남이 아버지의 재산 두 몫을 상속받는 것처럼(신명 21,17 참조), 엘리사는 정신적 아버지인 엘리야의 예언직책 승계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제자가 되려면 시험을 거쳐야 했다. 그것은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목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엘리사가 환상을 통해 하늘세계의 비밀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을 보았으나 동행인들은 못 보았듯이(사도 9,7 참조), 엘리사는 갑자기 나타난 불 말과 불 수레를 보았으나 다른 수련생들은 보지 못했다. 불 말과 불 수레는 하느님의 발현을 표현한다. 이처럼 엘리사는 하느님의 발현을 상징하는 물체를 식별함으로써 엘리야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음을 입증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겉옷을 집어 들었다.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예언직책을 승계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엘리야가 못 이룬 사명을 엘리사가 이룰 것임을 암시한다. 엘리사는 그 겉옷으로 요르단 강을 두 번 쳐서 마른땅을 건넜다. “이렇게 엘리사가 강을 건넜다.”(2열왕 2,14). 엘리야가 하늘로 자리이동을 하는 동시에 엘리사는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요르단 강 이편의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다시 말해 엘리사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려고 새로운 도전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 안주하려 했던 수련생들의 태도와는 정반대다.

 

묵상주제

 

엘리야는 소명의 자리를 버렸다가 다시 소명의 자리로 돌아갔다(1열왕 19장 참조).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검을 두 몫이나 받고 요르단 강 이편 소명의 자리로 돌아왔다. 내 소명의 자리는 어딘가? 예언자들이 소명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 것처럼, 우리도 우리 소명의 자리에서 주님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2014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115)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내렸구나”(2열왕 2,15).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체험했다(1열왕 19장 참조).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는 모습을 보며 하느님을 체험했다(2열왕 2장 참조). 이를 보고 예언자 무리는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내렸구나”(2열왕 2,15) 하며 엘리사의 하느님 체험을 인정했다. 이처럼 하느님 체험은 사람의 삶을 바꾼다.

 

시몬느 베이유(1909-1943)는 프랑스의 사회철학자요, 20세기를 대표하는 실천적 신앙인이며,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다간 여성이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36년 프랑코 독재에 맞서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다음, 영국으로 건너가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1943년 영국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베이유는 실천하는 지식인었다. ‘진리는 현장에 있다’고 확신한 그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야학을 지도하러 나갔고, 노동자들의 파업행렬에서 언제나 선두에 서곤 했다. 시몬느 베이유의 부모는 유태인이었지만, 베이유는 종교에 관심이 없었다. 가톨릭교회를 전체주의적인 냄새가 나는 거대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았다. 죽음이 임박해 주위에서 세례를 권했지만 거부했다.

 

시몬느 베이유는 1938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솔렘 수도원에서 열흘 동안 지내면서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때 거기에는 영국에서 온 가톨릭신자 청년이 있었는데, 그 젊은이가 시몬느 베이유에게 영국시인 조지 허버트의 ‘사랑’이라는 시를 알려주었다.

 

                        사랑

 

                                           조지 허버트(1592-1633)

 

사랑이 내게 오라 하시나 내 영혼이 뒷걸음치는 것은 

내 죄와 허물 탓이옵니다.

하지만 인자하신 사랑은 내가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나의 주저하는 마음을 알고 다가와 

부족한 것이 없느냐고 감미로운 음성으로 물으셨도다.

내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이 자리에 어울리는 손님을 부르소서.”

사랑이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바로 그 손님이로다.”

“무심하고 배은망덕한 죄인이? 

저는 감히 당신을 쳐다볼 수조차 없나이다.”

사랑은 내 손을 잡고 웃음으로써 대답하시기를

“네 두 눈을 만들어 준 이 바로 나 아니더뇨?”

“진리이신 주님! 그러나 난 내 두 눈을 망쳐 놓았나이다. 

내 수치가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가게 하소서.”

그래도 사랑께서는 말씀하더이다. 

“누가 비난 받았는지 너는 알지 못하느뇨?”

“나의 사랑이시여, 그렇다면 저는 시중이나 들겠나이다.”

사랑이 말씀하셨도다. 

“너는 앉아 내 살을 맛보아라. 

내 피를 맛보아라. 내 음료를 마셔라.”

그래서 나는 앉아 먹었더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이 시를 외울 때 그리스도께서 내려와 나를 사로잡으셨다”고 고백한다(1942. 5. 15. J.-M. Perrin 신부님에게 보낸 ‘영적인 자서전.’ Attente de Dieu, pp.43-45).

 

묵상주제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도 받지 않았던 시몬느 베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베풀어주시는 ‘사랑’이라는 시를 읽기만 하고 하느님을 체험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2014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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