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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어린양의 기원과 상징적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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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11-23 조회수5,351 추천수1

[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어린양’의 기원과 상징적 묘사

 

 

지난 9-10월 호에 이어 요한 묵시록의 전형적인 주제인 ‘그리스도 어린양’에 대하여 계속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어린양’의 기원과 상징적 묘사를 알아보자.

 

요한 묵시록에서 29번 사용되고 있는 ‘어린양(아르니온)’이란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어린양’ 또는 ‘양’을 뜻하는 ‘아렌, 아르노스’의 축소형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작은 어린양’이라는 의미가 되겠지만, 신약성경의 언어 ‘코이네 그리스어’에서는 크기가 작다는 느낌은 보이지 않는다.

 

 

‘어린양(아르니온)’이라는 용어의 기원

 

구약성경과의 관계

 

이 표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구약의 여러 단락이 연구되었다.

 

먼저, 아침과 저녁 시간에 바치던 어린양 제사(‘타밋’ : 탈출 29,38-42; 민수 28,3-8 참조)가 고려되었다. 그러나 성전의 파괴 이후에 더 이상 거행되지 않던 의식이 저자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의문이 남아있다.

 

두 번째 모델은 파스카 어린양이다(탈출 12,1-27; 레위 23,5-6; 신명 16,1-7 참조). 파스카의 어린양은 도살되고, 섭취되며, 그 피가 문설주에 뿌려졌다. 또한 이집트에서부터 약속된 땅에 이르기까지 해방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묵시록의 어린양 또한 도살된 것처럼 소개되고, 그 피의 효과를 통해 구속사업을 총체적으로 실현한다.

 

두 상징은 도살된 상태와 피의 효과라는 면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렇지만 세부사항에서는 다른 일치점이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는 이사 53,7에 나오는 ‘주님의 종’이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묵시록에 영감을 준 출발점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묵시록 저자의 신학적 · 성경적 의미나 문학적 구성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가끔 지적되는 예레 11,19(“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의 그리스어 번역에는 ‘어린양 같은’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묵시록은 이 번역에 의존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어린양(아르니온)’과 관련하여 저자가 구약에서 가져온 요소들은 특별히 탈출기와 그 외에 영감을 준 몇 가지 단서들뿐이다. 이 모든 요소를 다 합쳐도 묵시록의 ‘어린양’의 모습과 비슷하지도 않다.

 

요한 복음과의 관계

 

같은 요한계 문헌이라는 면에서 요한 복음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문학적 측면에서 요한 복음 안에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1,29), 그리고 나중에는 더 간단히 “하느님의 어린양”(1,36)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두 표현은 모두 요한 세례자의 입에서 나온다.

 

요한 복음에서 그리스도 어린양과 관련된 세 번째 구절은 탈출기를 인용하고 있는 19,36이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파스카 어린양에 대해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 강조되고 ‘어린양’이라는 명시적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요한 복음의 표현을 묵시록의 그것과 동일하게 볼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요한 복음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에서는 그리스어 ‘아르니온’이 아니라 ‘암노스’를 사용하고 있고, 묵시록에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어의 형태 측면에서 분명한 단절이 있다. 묵시록의 저자는 요한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의 어린양(암노스)’이라는 표현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언제나 ‘아르니온’이라는 용어를 견지한다. 과연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요한 복음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탈출기의 파스카 어린양과 연관되고, 아마도 이사야서 제2부의 ‘주님의 종’과도 연관될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인간의 죄를 없애시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임금으로 당신을 계시하신다(요한 19,19-22 참조).

 

그다음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왕적 권능을 어떻게 펼치실 것인가? 우리는 묵시록에서 하나의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요한 18,36 참조) 다른 유형의 것인데, 묵시록에서는 그 왕국이 실현되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왕국은 “세상 나라”(11,15)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 그리스도 어린양의 힘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묵시 17,14).

 

요약하자면,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의 역할은 새로운 측면을 맞이한다. 바로 인간 역사와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연관되는 임금으로서의 역할이다. 이 새로운 측면이 묵시록에서 ‘아르니온’이라는 갱신된 용어로 표현된다.

 

따라서 ‘아르니온’이라는 용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요한 복음의 ‘하느님의 어린양(암노스)’과의 연관성을 이해하고 전제해야 한다.

 

 

어린양의 상징적 묘사(묵시 5,6)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어린양은 살해된 것처럼 서 계신다.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이 두 상태는 상징적 묘사이다. ‘서 계신’, 곧 선 자세는 묵시록에서 부활을 가리키는 인간학적 상징이다. 이는 부활한 상태의 효과적이고 능동적인 ‘서 있음’이다.

 

이러한 표현은 어린양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사람들은 어린양께 의존하여 서 있는 것으로, 여기에서도 전형적인 부활의 힘을 상징한다.

 

두 증인은 살해된 뒤에 성령으로부터 생명이 나와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11,11). 승리자들은 새 창조의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위에(15,2 참조), 그리고 하느님의 어좌 앞에 ‘서 있다’(7,9 참조). 또 다른 상징 ‘살해되다’는 일반적으로 속죄의 희생제사의 의미를 암시하지만, 묵시록에서는 어린양께 사용될 뿐 아니라 분명히 이교적이고 폭력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표현이 어린양에게 적용될 때에는 ‘희생된’보다는 ‘살해된’이라는 의미가 더 적절하다. 이는 그리스도‘처럼’이라는 접속사는 묵시록에서 일반적으로 두 용어의 동등성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 동등성이나 동시성은 역설적이다. 한 주체가 부활하여 ‘서 있으면서’ 동시에 ‘살해되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긴장 또는 모순을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처럼’이라는 접속사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요한 20,19-20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한가운데에 서시며 …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부활하신 분‘(서시며’)으로 소개하지만 여전히 수난을 지니고 계신 분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못 자국이 남아있는 손과 열린 옆구리는(요한 20,24-27 참조) 십자가형에 처했던 상황을 지칭한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수난을 겪으신 그리스도가 같은 분임을 증명하시려는 의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토마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그분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믿으면서 동시에 수난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요한 복음과 묵시록의 사건이 모두 ‘주님’의 경험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강조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부활하신 분으로 찬양하고 표현하면서 동시에 살해되신 분으로 이해한다. 전례적 찬양의 분위기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수난의 효과를 그대로 지니신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그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양할 뿐 아니라 그분의 부활에 동참한다. 이는 단순히 그분의 부활만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에도 동참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여기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상징으로서 총체성과 완전성을 지칭한다. ‘뿔’은 구약에서 널리 알려진대로 힘을 가리켜 말하는 동물학적 상징이다. 특별히 예언서의 상징 안에서 뿔은 신체적 능력을 말할 뿐 아니라 ‘권능’도 표현한다.

 

묵시록의 저자는 그것을 다시 취해 그리스도의 상징적 묘사에 적용한다. 그리스도는 어린양(아르니온)으로서 왕적 권능을 지니시고 또 펼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권능은 인간 역사 안에서 모든 부정적인 표지를 결정적으로 극복하실 수 있는 총체적이고도 전체적인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임금으로서 당신의 권능으로 모든 부정적 세력에 승리를 거두심으로써 구원사의 완성으로 이끌고 계신다.

 

* 이성근 사바 신부. 1991년 사제로 수품, 현재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을 맡고 있다. 교황청립 성서대학을 졸업했다.

 

[경향잡지, 2015년 11월호, 이성근 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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