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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여행49: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말라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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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12-14 조회수3,652 추천수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9)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말라 3,23)


심판의 날을 두려움 없이 맞으려면



- 말라키, 두치오 디 보나세냐 작.


마지막 예언서, 말라키서가 남았습니다. 구약의 예언들은 늦은 시기로 갈수록 종말론적 색채가 강해집니다. 그 마지막인 말라키서는,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3,19)고 예고하며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고 우리를 일깨웁니다.

‘말라키’라는 이름은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어떤 예언자에게라도 적용될 수 있는 이름이겠지요. 실제로 ‘말라키’라는 이름을 가진 예언자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인물을 이렇게 부르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가상으로 ‘나의 사자’를 이 책의 저자로 내세우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말라키서에는 말라키가 언제 태어났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본문을 보면서 시대를 짐작할 따름입니다. 이 책에 나타난 사회적, 경제적 상황, 그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고 있다는 언급 등을 근거로 이 책이 작성된 때는 성전이 재건된 때로부터 느헤미야의 개혁이 있기 이전 사이의 시기, 대략 기원전 5세기 전반으로 봅니다.

이 작은 책에서는 당시에 문제가 되고 있던 주제들을 하나하나 들고 나와 논쟁을 합니다. 그 형태가 눈길을 끕니다. 매번 하느님이, 또는 예언자가 한마디 말을 하면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이 반박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 대답으로 설명이 뒤따릅니다. 이러한 논쟁이 여섯 번 펼쳐집니다.

그 논쟁들 가운데 특별히 부각되는 주제가 종말의 심판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과연 의인과 악인의 행동을 보고 계시며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시는지 의심을 품습니다. “주님의 눈에는 악한 일을 하는 자마다 다 좋고 그분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좋아하신다”(2,17). 이게 웬 말입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악인들이 아닙니다. 의인들이, 착하게 살아도 복을 받기는커녕 고생만 많고 오히려 악한 사람들이 글자 그대로 잘 먹고 잘살고 있으니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보지 않으신다고,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바에야 무엇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악인들이 번영을 누리며 잘 사는 것을 보면, 하느님은 그들에게 오히려 잘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악인들의 번성이라는 문제 때문에, 의인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은 과연 이루어지는가, 지혜문학에서도 크게 부각될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말라키서가 하는 대답이 종말의 심판입니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고 의인과 악인이 서로 다른 운명을 맞게 될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3,1). 사람들이 볼 때에는 선을 행하는 이들이나 악을 행하는 이들이나 아무 차이가 없이 그냥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의인과 악인을 가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와 섬기지 않는 자를 가릴”(3,18) 날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이름은 “비망록에”(3,16)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3,14)라고 말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부모가 자식을 아끼듯이 당신을 섬기는 이들을 아껴 주실 것이며, 그날에 의인과 악인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종말에 대한 말씀들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습니다. 악인들이 번성하는 현실 앞에서 신앙이 흔들리던 말라키 시대 사람들에게 주님의 날, 심판의 날은 무서운 날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날이라는 점입니다. 말라키서가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말하는 것은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인들에게 있을 상급을 약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괴로워한 것은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심판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두려움 없이 맞을 수 있을까요? 말라키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비법을 알려 줍니다.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고, 엘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3,22-24 참조). 다른 새로운 가르침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그 길을 충실히 따라가도록 예언자들이 옆에서 일깨워 줄 것입니다. 모세오경과 예언서가 완성되어 가던 시기에, 말라키서는 그 가르침들이 주님의 날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준비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있던 율법이고 이미 있던 예언서라 하더라도, 그 가르침들이 주님의 날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지침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키서에서 새롭게 부각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마지막 단락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성경은 히브리 성경과 책들의 배열 순서가 달라서, 말라키서가 구약의 마지막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말라키 예언서 3장 22-24절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건너가는 문턱이 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신약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여러 차례 인용하며(마태 17,10-13; 마르 9,11-12; 루카 1,17) 이것이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면 예수님보다 앞서 엘리야가 왔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한 주장을 부인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그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알아듣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구절을 통하여 신약이 구약의 전망에 연결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약속들이 성취됨을 봅니다.

[평화신문, 2015년 12월 13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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