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12: 고통 받는 주님의 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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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5-12-22 | 조회수4,846 | 추천수1 | |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 12] 고통 받는 주님의 종
‘모든 지식은 선입견이 되기 쉽다.’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지만, 자기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생소한 것은 존재도 인정하기 힘들다. 어쩌면 고통 받는 메시아를 예언한 이사 53장이 신약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구약성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사야서에는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의 신탁이 나온다. 53장은 그 일부다. 이 신탁의 경계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필자는 42,1-7; 49,1-9ㄱ; 50,4-9; 52,13-53,12로 구분한다. 한 편의 시처럼 연달아 읽히지는 않더라도, ‘주님의 종’에 대한 메시지를 일관성 있게 전달해 준다.
주님의 종은 세상 백성들에게 공정을 펴고(42,1 참조), “민족들의 빛”이자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될 임무를 받았다(42,6; 49,8 참조). 어떤 어려움에도 지치거나 기가 꺾이는 일 없이(42,4; 50,6-9 참조),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게 될 것이다(49,6 참조). 사람들은 우러러 볼 풍채나 위엄도 없는 그를 멸시했지만, 사실은 그가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놓아 자기들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었음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53,1.3.10-11 참조).
주님의 종 신탁이 이사야서에 나오긴 하지만, 이사야가 남긴 예언은 아니다. 후대에 제2이사야라고 이름 붙인 무명 예언자의 신탁이다. 기원전 6세기 후반 곧 바빌론 유배가 끝나갈 즈음에 살았던 인물이니, 예수님 시대와는 오백 년 이상 차이가 난다. 신탁의 내용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활동과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종의 정체만큼 구약성경에서 많은 논쟁을 일으킨 주제는 일찍이 없었다. 아직은 모두가 동의하는 해석을 찾아내지 못한 상태이지만, 유다교는 이 종이 이스라엘 민족을 뜻한다고 보았고,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에 대한 예고로 풀이해 왔다.
필자도 예수님에 대한 예고라고 늘 생각해 왔기에, 처음에는 논쟁이 있다는 자체가 충격이었다. 이번 연재의 마지막인 이 글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종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고, 제2 이사야가 예언한 종의 정체를 규명해 볼 것이다. 그리고 신약 시대 유다인들이 기대한 메시아 상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하려 한다.
주님의 종
성경에는 종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아브라함도 주님의 종이고, 모세와 다윗 모두 종으로 불렸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왜 그렇게 낮은 호칭으로 부르셨는지 의아할 수 있으나, 종(에베드)은 ‘섬기다’, ‘경배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아바드’에서 파생되었다.
일반 노예도 포함하지만(창세 24,2 참조), 임금을 섬기는 신하도 종이다. 곧 직급 높은 관리들도 그렇게 불렸다. 예를 들면, 유다 임금 히즈키야의 신하들도 히브리어 본문에 ‘에베드’로 나온다(2열왕 19,5 참조). 종교적으로는 종이 ‘하느님을 섬기는 이’를 뜻한다.
특히 종은 성조나 임금, 예언자들에게만 붙여지던 영광스러운 호칭이었다(시편 18,1: “주님의 종 다윗”; 민수 12,7: “나의 종 모세”; 신명 9,27: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등 참조). 그러다가 기원전 6세기 후반, 제2 이사야가 이 호칭의 범위를 넓혀, 이스라엘 백성도 주님의 종으로 불리게 되었다(이사 41,8; 43,10 참조).
제2 이사야
집회 48,23-24에도 암시되듯“(시온에서 통곡하는 이들”은 바빌론에 나라를 빼앗기고 우는 유다인들을 뜻한다.), 처음에는 이사야가 이사야서 전체를 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기 12세기에 ‘이벤 에즈라’라는 주석가가 40장부터는 다른 예언자가 썼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한 다음부터, 지금은 대부분 이 의견에 동의한다.
그 근거로는 첫째, 이사야가 활동한 기원전 8세기는 유다 왕국이 건재하던 시절이다. 그때만 해도 예루살렘과 다윗 왕실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시온 신학’이 강했다(「경향잡지」 8월 호 참조).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산헤립 임금이 예루살렘 정복에 실패한 뒤에는 그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그 반면 40장부터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지고 바빌론 유배까지 끝난 뒤를 겨냥하므로, 이사야의 신탁으로 보기 어렵다. 일단 동시대 청중이 그 신탁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므로, 이사야도 예레미야처럼 거부당해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서에는 그런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40장 다음부터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종종 언급된다. 키루스는 기원전 6세기 후반 사람이기에 이사야와 이백 년가량 차이가 난다. 곧 이사야가 키루스의 이름까지 알고 있기에는 간극이 너무 크다. 게다가 키루스는 이 신탁에서 주님의 메시아(45,1: “기름부음받은이”)로, 또 “목자”(44,28)로 불린다. 다윗 왕실이 건재하던 이사야 시대에 이방 임금을 메시아나 목자로 부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셋째, 고향인 시온으로 돌아가라고 독려하는 48,20; 52,11은, 백성이 이스라엘 땅에 잘 살고 있던 기원전 8세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40장 다음부터는 제2 이사야라 불리는 다른 예언자의 신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종’의 정체
그렇다면 제2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의 종은 누굴까? 유다교는 바빌론 유배지에서 고통 받던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보았다. 49,3에 그 종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하지만 주님의 종은 49,6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을 일으키는 임무를 받기에 모순이 발생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지파들을 회복시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마 종에게 주어진 이스라엘 호칭은 그가 백성을 대표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다가 주님의 종은 죄가 없음에도 다른 이들을 위해 수난을 겪지만(53장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한 죄로 바빌론에 유배되었다. 42,7과 43,8 등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눈 멀고 갇힌 자들로 묘사되어 구원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 밖에 키루스나 예레미야, 제2 이사야 등을 종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었다. 제2 이사야로 보는 의견이 특히 강했다. 주님의 종 신탁이 대부분 일인칭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일인칭은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실 때와 화자가 예언자 자신일 때다. 이 종이 하느님이 아니라면, 남은 대안은 예언자일 것이다.
사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이사야서를 읽던 에티오피아 내시가 제시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였다(8,34: “청컨대 대답해 주십시오. 이것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그렇지만 이 해석은 53장에서 문제가 된다. 거기서는 화자가 ‘우리’고 종은 삼인칭으로 나온다. 또한 53장은 종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암시를 준다(9-10절 참조). 만일 예언자가 자신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면, 스스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했다는 말이 되므로 합당하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실현된 주님의 종
수수께끼 같은 종의 정체는 신약 시대에 와서 실마리가 보인다. 예수님이 바로 그 ‘고난 받는 종’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마태 12,15-18 참조). 당신께서 맺으신 “새 계약”(루카 22,20)은 주님의 종이 임무로 받은 “백성을 위한 계약”(이사 42,6; 49,8)을 떠올린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베드로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실 때는 이사 53장을 암시하셨다. 곧 메시아는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사 53,10의 예고처럼 부활하시리라는 희망도 보여주셨다(마태 16,21 참조).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제자들에게 하신 수난 예고(마르 10,32-34 참조)도 마찬가지다. 겟세마니에서 잡히시기 전에는 이사 53,10을 인용하셨다(루카 22,37 참조). 곧 ‘무법자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지리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당신이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임을 예고하셨다.
마태 8,16-17은 예수님께서 병자와 악령 들린 이들을 고치신 기적을 이사 53,4의 실현으로 보았다. 요한 12,38에는 이사 53,1이 인용된다.
임금이신 메시아와 고통 받는 메시아
그렇다면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메시아 예언으로 가득한 이사야서에서 임금이신 메시아를 중점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1,1-9과 9,5-6이 승리하는 임금을 메시아 상으로 내세운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임금으로 오실 메시아가 고통을 받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53장에 묘사된 종도 메시아로 보기 어려웠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강력한 투사라고 믿었다(루카 24,21 참조).
아마 예수님께서도 이 간극을 헤아려, 공개적으로 당신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을 막으신 듯하다(마태 16,20 참조). 그렇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유다인들이 다른 방식으로 이사 53장을 해석했기에 오히려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곧 이사 6,9의 예고처럼 유다인들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도 깨치지 못한’ 사이에 신탁이 실현되었던 것이다(요한 12,39-40 참조).
고통의 신비
고통 받는 메시아는 이스라엘이 미처 이해하지 못한 신비였다. 너무 생소해서 제자들도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구약 시대에 이미 “사제들의 나라”(탈출 19,6)가 되는 소명을 받았다. 속죄 제물은 율법적으로 사제들의 손으로 바쳐야 하기에, 이스라엘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주님의 종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쳤던 것이다.
당시 유다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진정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을 쓰러뜨려 쟁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이 사라질 때 하느님 나라의 참평화가 실현된다(이사 2,1-4 참조). 칼로 일어선 자가 칼로 망하듯, 무력은 또 다른 무력의 씨앗을 잉태한다.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은 신들이 인간 위에 군림하며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성경의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이 되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다. 당신의 아들을 종으로 수난을 겪게 하시고 단 한 번의 제사로 하느님 나라를 열어주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고통의 신비가 아닌가?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12월호, 김명숙 소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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