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공관복음의 눈먼 이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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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9-17 | 조회수4,573 | 추천수0 | |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공관 복음의 눈먼 이들
복음서의 치유 사화
성경의 네 복음서는 모두 상당한 양의 예수님의 치유 사화를 전한다. 짧은 공생활 기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들까지 살려 내셨다. 지금보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를 고려하면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가히 카리스마적이다.
치유해 주신 질병의 종류도 마비성 질병,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 한센인(나병 환자)등 다양하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요한 21,25)고 전한다. 이 표현은 치유 사화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알게 한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치유
세례자 요한이 죽기 전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메시아)에 대해 질문한다. 요한에게 전하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눈먼 이들이 보고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오늘 보게 될 ‘눈먼 이들이 눈을 뜬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이 ‘오실 분’이심을 명백히 보여 준다.
벳사이다의 눈먼 사람 이야기(마르 8,22-26)
벳사이다의 눈먼 사람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에만 나오는 치유 사화인데, 구조적으로 갈릴래아에서의 활동(1,14-8,21)과 예루살렘으로의 여정(8,27-10,52)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하고 있다. 벳사이다는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고기잡이 집’이란 뜻이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필립보도 모두 벳사이다 출신이다(1,44). 예수님의 활동은 주로 갈릴래아 호수 북쪽 마을인 코라진과 가파르나움 그리고 벳사이다 등에서 이루어졌다. 그중 벳사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않아 코라진과 함께 회개하지 않은 고을이라고 책망을 받은 곳이다(마태 11,21; 루카 10,13 참조).
사람들이 ‘마을’ 안으로 눈먼 사람 하나를 데리고 온다. 복음서에선 ‘마을’(마르 8,23.26)이라고 부르지만,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따르면 헤로데 필립보는 로마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자 벳사이다를 도시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의 치유를 위해 데리고 온 것을 보면 확실히 눈먼 이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기만’ 해도 눈먼 이가 곧바로 나을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애써 마을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그를 데려왔다. 그렇지만 이 무슨 일인가!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손을 직접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신다. 치유를 위해 안으로 들어왔는데 도리어 밖으로 나가신다.
혹시 마을 사람들 때문에 마을 밖으로 나가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를 치유하신 뒤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26절 참조)고 하신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이 눈먼 이에게 이롭지 않은 사람들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 눈먼 이를 배려하셔서 그랬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어 주셨다. 현대인에게 침의 좋은 효능이 잘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도 침을 바르는 것은 민간요법이었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시자 눈먼 이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인다고 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은 눈에서 전달된 정보를 뇌가 처리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눈먼 이는 사람과 나무를 동시에 인식한다. 오랫동안 눈먼 상태에 있던 사람이 ‘걸어 다니는 나무’에서 점차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치유 기사는 다른 기적 사화들과는 달리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번째 손을 얹어 주신 뒤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두 번에 걸친 점진적 치유는 어쩌면 눈먼 이 자신의 육체적 눈과 마음의 눈을 함께 뜨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주 삶의 고통 앞에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잃기도 하고 세상을 왜곡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왜곡된 것을 바로잡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자 할 때 그 과정은 대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눈먼 이는 타인에 의해 마을에 왔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시는 동안 그분과의 통교는 예수님에 대한 그의 인식과 또 스스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성찰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데려온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크게 가졌을 것이다.
사실 그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꼭 데려와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 노고를 기꺼이 한다. 그들은 스스로 선(善)을 실천하고 있다. 선의란 대가가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고마움을 모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의든 타의든 도움을 받는다. 우리 삶 속에는 우리를 도와준 수많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자주 그들의 노고를 잊거나 평가 절하를 하며 살기도 한다. 고마움을 아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
예리코의 눈먼 이(루카 18,35-43)
예리코의 눈먼 이 이야기는 공관 복음서에서 모두 전한다(마태 20,29-34; 마르 10,46-52; 루카 18,35-43).
그런데 세 복음서는 눈먼 이를 만난 시기와 그들의 숫자, 이름 등이 조금씩 다르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만난 시기가 예리코를 떠나실 때지만 루카 복음서는 예리코에 들어가실 때다.
눈먼 이의 숫자도 마태오 복음서는 두 명이지만, 마르코와 루카는 한 명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만이 그의 이름이 바르티매오라고 알려 준다. 이렇게 세 복음서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은 각 복음서 저자들의 고유한 신학적 관점이 낳은 편집의 결과이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각오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입구인 예리코에 들어가신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제자들과 군중은 메시아에 대한 큰 기대와 함께 희망에 들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해 착잡한 심정으로 그 길을 걷고 계셨을 것이다. 그 시간 그 길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의 길이었다.
바로 그 길에 어떤 ‘눈먼 이’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당시 눈먼 이는 유다인들에게 삶의 바탕인 율법에 따라 죄가 있다고 단정된 존재이다.
또한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대부분 구걸로 생계를 유지했다. 예리코의 눈먼 이에게 그 길은 그의 삶을 영위하게 해 주는 고마운 길이다.
대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청각은 예민하게 발달하여 있다고 한다. 갑자기 수많은 사람의 발소리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알고 보니 유명한 치유자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이었다.
먼저 큰 소리로 외치고 보았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런데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다. 눈먼 이에 대한 군중의 일방적인 제지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와 레드의 대화를 생각나게 한다.
희망이라는 말을 건넨 앤디에게 레드는 “희망은 위험한 거야. 여기서는 아무 쓸모가 없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거야.”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탈출한 뒤 앤디는 레드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희망은 좋은 것이죠. 아마도 가장 좋은 것일 거예요. 그리고 좋은 건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중도 장애인이었던 예리코의 눈먼 이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전에 보았던 세상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잠할 수가 없었다. 신이 주신 기회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지금 그를 꾸짖는 사람들의 제지는 여태까지의 고통에 비하면 그에겐 조족지혈이었다.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했던가! 눈먼 이의 절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셨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하시며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셨다.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보물
치유 뒤 예수님에 대한 눈먼 이의 감사와 기쁨의 에너지는 그를 구박하던 군중의 에너지도 바꾸어 놓을 정도였다. 그런 점을 보면 그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눈이 멀었지만 마음의 눈은 늘 열려 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삶의 고난에서 어떨 때는 벳사이다의 눈먼 이처럼 타인의 도움으로, 때론 예리코의 눈먼 사람처럼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가 은총을 받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오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눈을 열어 우리 삶의 보물인 ‘고마운 사람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 허귀희 클라라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수녀.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미국 엘름스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7년 9월호, 허귀희 클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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