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 이야기33: 예수님의 정체, 그분을 따르기(루카 9,18-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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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0-01 | 조회수4,304 | 추천수0 | |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33) 예수님의 정체, 그분을 따르기(루카 9,18-27) 베드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 고백하다
-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곳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60㎞ 정도 떨어진 카이사리아 필리피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파네아스라고 불렸는데 헤로데 대왕의 또 다른 아들 헤로데 필리포스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도시를 세우면서 카이사리아 필리피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는 바니아스라고 불린다. 사진은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 유적이 남아 있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가톨릭평화방송 여행사 제공.
베드로의 고백(9,18-21)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셨고, 제자들이 함께 있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9,18) 제자들의 답변은 헤로데 영주가 소문에 들은 이야기와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옛 예언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9,19; 9,7-8 참조)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고, 시몬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엄중히 분부하십니다.(9,20-21)
이 짧은 이야기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함구령입니다. 예수님의 신원 이해와 관련해, 군중들의 답변과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답변이 다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엘리야나 옛 예언자에 속하는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지만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반면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란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 이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구세주라는 뜻입니다.(1414호 5월 14일 자 참조)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 마태오복음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마태 16,17)이지만, 루카복음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이 고백은 그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직접 보고 체험한 데서 나온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엄중하게 분부하십니다.(9,21) 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요? 그다음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상류 요르단 강 수원지 중 하나다.
수난과 부활의 첫 예고(9,22)
함구령을 내리신 예수님께서는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9,22)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들을이민족의 압제에서 구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로마의 지배에서 풀어 주실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나 되는 장정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까지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시면서 오히려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가 되살아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들은 이스라엘의 지배층입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은 유다인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이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할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부에게 배척과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상과는 멀어도 한참 멉니다. 물론 “되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덧붙이기는 하셨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긍정하시면서도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것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상과 메시아이신 당신이 가서야 할 길이 엄청나게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요? 달리 말하면 제자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명과 그분의 길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일깨우시고자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나(9,23-27)
이렇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주목할 것은 이 말씀을 제자들 곧 사도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려는 “모든 사람”(9,23)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9,23)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는 말씀과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은(9,24-25)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9.26) 예수님이나 예수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면,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오실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을 따르는 법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9,27)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이,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지는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이를 살리신 것 또한 하느님의 다스림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사람이 있으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루카가 바로 이어서 묘사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또한 하느님의 다스림의 펼쳐진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지요? 아니면 자신을 지키고 내세우려 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외면하면서 입으로만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지요? 혹시 그리스도 신자임을 밝히는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거나 선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지요?
- 예수님의 길은 배척과 고난, 수난과 죽음을 거쳐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가시고 우리는 그 길을 따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배척과 고난, 수난과 죽음을 겪어야만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면 되니까요. 때로는 그 십자가마저 고달프고 무겁게 느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안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0월 1일, 이창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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