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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히브리어 산책: 하르, 그불, 기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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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24 조회수6,852 추천수1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하르, 그불, 기브아


세상 중심에 우뚝 서 계신 하느님

 

 

오늘 전교주일 말씀에 산(山)이 자주 나온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가장 높은 산이요 그곳에서 주님은 민족들을 재판하시고(1독서) 모든 민족의 눈앞에 정의를 드러내신다.(화답송)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산으로 갔다. 사실 성경의 하느님은 산과 특별한 인연이 있고, 히브리어에는 산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다.

 

하르. 산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말로, 히브리어의 기초단어에 속한다.

 

 

지역과 경계와 의례

 

히브리어로 산은 ‘하르’다. 문맥에 따라 산, 산맥, 언덕 등으로 다양하게 옮긴다. “길보아 하르”는 “길보아 산”이요(1사무 31,1), “그리짐 하르”와 “에발 하르”는 “그리짐 산”과 “에발 산”이다.(신명 11,29) 하르는 산과 그 부근을 일컫기도 한다. 그래서 “길앗 하르”는 “길앗 산악 지방”(창세 31,21)으로, “유다의 하르”는 “유다 산악 지방”으로 옮긴다.(여호 21,11) “하르의 땅”은 “산악 지방”이다.(여호 10,40)

 

산이나 강은 자연적인 경계를 이룬다. 그런 ‘경계의 산’은 히브리어로 그불이라 한다. 그불은 다양하게 옮긴다. “서쪽 그불”은 “서쪽 경계”(민수 34,6)이고, “아르논 강의 그불”은 “아르논 강 경계”이다.(민수 22,36) 그불은 경계 안쪽의 땅을 말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불을 그저 “지역”으로 옮길 수도 있다.(신명 19,3) “거룩한 그불”은 “거룩한 영토”(시편 78,54)다.

 

이스라엘의 이웃들은 높은 산에서 자신들의 신을 섬기곤 하였다. 그럴 때 쓰는 산은 흔히 ‘기브아’라고 하였다. 구약성경을 보면 기브아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라는 말씀을 자주 볼 수 있다.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 시대에 사람들이 “지은 죄는 자기 조상들이 지은 모든 죄보다 더 커서 주님의 격정을 불러일으켰다.”(1열왕 14,22) 그들은 “높은 기브아(언덕) 마다” 다른 신의 기념 기둥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던 것이다.(1열왕 14,23) 기브아는 고유명사로도 쓰인다. 본래 이방민족에게 속했지만, 훗날 벤야민 지파에 속한 곳의 이름이 기브아다.(여호 18,28)

 

그불. 본디 산을 의미하지만 ‘경계’ 또는 ‘지역’의 의미로 더 자주 쓰이는 말이다. 김멜(파란색) 안의 하늘색 점은 일부 자음(bgdkpt)으로 음절이 시작할 때 사용하는 기호다(약한 다게쉬).

 

 

천상과 지상이 만나는 하르

 

구약성경의 하느님은 산과 관련이 깊다. 이집트 탈출 이후에 하느님과 백성이 계약을 맺고 토라를 받은 곳은 시나이 하르였다. 천상의 하느님께서 “시나이 하르”(시나이 산) 위로 내려오셔서 모세를 부르시자 모세가 올라갔던 것이다.(탈출 19,20)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하르”에서 말씀을 다 하신 다음, 석판에 십계명을 쓰셔서 모세에게 주셨다.(탈출 31,18) 이렇게 시나이 하르는 주님께서 현현하신 곳이요, 인간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신 곳이다. 그래서 레위기 등에서는 구약의 율법이 “시나이 하르”에서 받은 것이라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레위 7,38 등)

 

시나이 산은 주님을 만났던 곳이니, 세상의 중심이요 천상과 지상이 만나는 곳이다. 주님의 명에 따라 모세와 백성의 대표 70명이 시나이 하르에서 주님께 나아갔을 때(탈출 24,1-2), 실제로 그들은 천상에 있는 듯한 체험을 하였던 것이다.(탈출 24,10)

 

세상의 중심인 산을 ‘세상의 배꼽’이라고 표현하는 곳도 있다. 아비멜렉 판관이 스켐의 가알에 맞서 전쟁을 할 때, 가알은 “하르 꼭대기(산꼭대기)에서 군대가 내려오고 있소”(판관 9,36)라고 급박하게 보고했다. 그런데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군대를 “세상 배꼽”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말했다.(판관 9,37) 인간의 배꼽은 몸 한가운데 있고, 우리가 어머니와 직접 연결되었던 곳이다. 이렇듯 세상의 배꼽은 세상의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창조 권능과 직접 연결된 곳이라는 말이다. 천상과 지상이 만나는 산의 거룩한 속성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 기브아.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믿는 의례를 행하거나 그런 의례를 위해 신전이나 산당을 세운 언덕을 흔히 기브아라고 일컫는다. 회색의 윗첨자 e는 거의 발음되지 않는다.

 

 

구약성경의 하느님께서 산과 관련이 많으시니, 이민족들은 야훼 하느님을 아예 산의 신으로 본 것 같다. 아람 임금의 신하들은 그들의 임금에게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산들의 엘로힘”이라고 보고했는데, “산악지방의 신”(1열왕 20,23.28)이란 말이다. 아람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산신(山神)의 일종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주님의 산에서 만백성에게

 

오늘 독서를 보자. 하르 위에 주님의 집이 서 있고, 그 하르는 모든 하르 위에 굳게 세워져 있다.(이사 2,2) 마치 시나이 하르에서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받았던 때처럼, 주님의 가르침이 산에서 나오고(2,4) 주님의 빛이 만백성에게 비칠 것이다. 구약의 하느님처럼 예수님의 생애도 산과 인연이 깊다. 예수님의 가장 귀한 가르침은 산에서 이루어졌고(산상수훈) 구원의 가장 지극한 신비가 만백성에게 드러난 곳은 골고타 산의 십자가 위였다. 만민에게 복음의 빛이 닿길 고대한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0월 22일, 주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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