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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수님 이야기45: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루카 11,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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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1-01 조회수6,459 추천수0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45)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루카 11,37-53)


투명한 잔에 탐욕과 사악함을 채우는 어리석음

 

 

-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으신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의 사악과 어리석음을 질타하시는 계기로 삼는다. 그림은 디르크 보우츠(1415~1475) 작, ‘시몬 집에서의 그리스도’. 출처=가톨릭 굿뉴스.

 

 

제자들과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번에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향합니다. 이들에 대한 가르침은 꾸짖음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호되게 질타하신다고 해도 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들을 꾸짖으실까요?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고 예수님께서는 초대에 응해 그 집으로 가셔서 자리에 앉으십니다.(11.37) 복음서들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이들로 많이 묘사됩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서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는데(7,36; 14,1 참조) 식사 초대가 일반적으로 친교를 나누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바리사이 가운데는 예수님께 호의적인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이 발단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이를 보고 놀란 것입니다.(11,38)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일종의 정결례 예식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무시하시자, 초대한 바리사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꾸짖음의 대상도 그 바리사이 혼자가 아니라 다른 바리사이에게로 확대됩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11,39-41)

 

예수님께서는 말하자면 바리사이들의 외적이고 형식적인 믿음을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드셨다면 겉만 깨끗이 할 것이 아니라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속도 깨끗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함을 깨끗이 치우고 깨끗이 할 때에 사랑의 실천인 자선을 베풀 수 있고 이를 통해서 다른 모든 것 곧 겉까지도 깨끗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질타하시는 말씀을 연이어서 하십니다. 그 말씀은 모두 “불행하여라”로 시작합니다. ‘불행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질타의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십일조를 바치는 외적 규정은 곧잘 지키면서도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꾸짖음입니다.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 곧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1,42) 여기서 의로움은 정의를, 하느님 사랑은 자비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 더욱 본질적이라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의와 자비의 실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십일조 지키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면 우리 역시 ‘불행하여라’ 하는 선언을 당할 것입니다. 

 

둘째,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태도에 대한 꾸짖음입니다. 회당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11,43) 바리사이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를 나무라시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바리사이들이 드러나지 않은 무덤 같다는 꾸짖음입니다.(11,44)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 땅의 일반적인 무덤은 봉분이 아니라 땅속의 자연 동굴을 사용한 무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아무 표시도 해놓지 않으면 그 위를 다니면서도 그곳이 무덤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에 따르면 시신을 만지거나 무덤과 접촉하면 일주일 동안 부정(不淨)하게 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무덤에 회칠로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회칠하지 않은 무덤 같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하게 되도록 만든다고, 곧 죄를 짓게 한다고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꾸짖음이 계속되자 율법 교사 한 사람이 항의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11,4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하고 선언하시면서 율법 교사들을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 역시 세 번에 걸쳐 이뤄집니다. 

 

첫째, 사람들에게 힘겨운 짐을 지워놓고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1,46) 당시 이스라엘에는 백성이 지켜야 할 규정이 무려 613가지나 있었다고 합니다. 안식일법, 정결례법, 음식 규정 등이 대표적이지요. 율법 교사들은 율법의 전문가들로서 이 법 규정의 수호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백성들에게는 지키기 힘든 규정을 강요하면서 자기들은 지키지 않는 율법 교사들을 향한 꾸짖음입니다. 

 

둘째,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언자들을 높이 기리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적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면서 오히려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동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11,48)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소행에 동조한 대가는 절대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라시며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적시하십니다. 아벨은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로서 형 카인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경이 밝히는 인류의 첫 살인의 희생자입니다.(창세 4,8-10) 즈카르야는 유다 임금 요아스(재위 기원전 835~796)의 명령으로 돌에 맞아 죽은 사제입니다.(2역대 24,20-22) 유다교 구약성경 경전에는 역대기가 제일 마지막에 나온다는 점에서 즈카르야는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희생된 예언자를 나타냅니다. 

 

셋째, 율법 교사들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는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까지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11,52) 여기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참된 지식을 의미한다지요. 말하자면 예수님 말씀은 율법 교사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뽐내지만 실은 참된 지식이 아닐뿐더러 사람들도 참된 지식을 얻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것까지 막아 버리고 있다고 비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바리사이들처럼 내면을 깨끗하게 하기보다는 외적이고 형식적인 규정에 집착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이 무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면을 깨끗이 하지 않고 겉모습에 집착할 때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는 질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되새겨보면,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내면이 사랑으로 차 있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했다”면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노렸다”고 전합니다.(11,53)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반감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1월,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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