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 이야기51: 안식일의 치유와 두 가지 비유(루카 13,10-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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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2-10 | 조회수5,136 | 추천수0 | |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51) 안식일의 치유와 두 가지 비유(루카 13,10-21) 겨자씨 비유에는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등 굽은 여인의 치유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두 가지 비유에는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구원의 때가 밝아왔다는 것입니다. 본문 내용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등 굽은 여인을 안식일에 고쳐주시다(13,10-1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마침 허리가 굽어 몸을 펼 수 없어 고생하는 여인을 보시고는 고쳐주십니다. 그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13,11)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고질병이었고 따라서 쉽게 고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합니다.(13,12-13) 예수님으로 인해 그 여자에게 구원이 왔고 그 여자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구원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 모습을 본 회당장이 펄쩍 뛰고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이지요. 회당장은 차마 예수님께 대들지는 못하고 사람들에게 소리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되니 그때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13,14-15)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13,15-16)
안식일에는 안 된다고 분개한 사람은 회당장 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은 “위선자들아!” 하고 복수로 말씀하십니다. 그 자리에는 회당장과 치유받으려는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 가운데는 회당장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들까지 싸잡아서 말씀하신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안식일에 통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도 된다면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 즉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은 더욱더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안식일과 연관된 예수님의 다른 일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루카 6,1-11)
학자들은 여인이 병마에 시달린 ‘열여덟 해’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임금 에글론 밑에서 종살이한 기간과 필리스타인들과 암몬 사람들에게 억눌려 살았던 기간과 같다는 사실(판관 3,14; 10,8 참조)을 주목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 등이 굽은 여인을 고쳐 주신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질병 치유를 넘어 이민족에서 억눌려 지냈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시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치유 사건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고 선포하신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린다고 하겠습니다. 구원의 때가,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적대자들은 망신을 당했지만 군중은 기뻐합니다.(13,17)
- 하느님 나라는 작은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림은 정미연 화백의 ‘겨자씨 자라 큰 나무 되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 (13,18-21)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등 굽은 여인을 고쳐 주신 일화에 이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비유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전합니다. 두 비유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13,18) 또는 “하느님 나라는 무엇에 비길까?”(13,20)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라는 말은 등 굽은 여인의 치유로 도래한 구원의 때와 바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활동으로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를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좁쌀만합니다. 그런데 중동 지역에서는 이 겨자씨가 땅에 심겨 자라나면 높이 2m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겨자씨는 사실은 일년생 풀이어서 나무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13,19) 그만큼 크게 된다는 것이지요. 경계가 없는 창공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생물이 새라는 것을 감안하면 새들이 깃들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사실상 온 세상으로 퍼져나간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 오는 누룩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올랐다”(13,20)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지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온통 부풀어오른 밀가루 반죽처럼 성장하고 커지리라고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은 ‘사톤(σατον)’을 번역한 것으로 약 18ℓ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밀가루 서 말은 54ℓ이고 이를 빵으로 구우면 54㎏에 이른다고 하지요. 하느님 나라가 그만큼 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겨자씨의 비유나 누룩의 비유는 사실상 같은 내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비록 왜소하고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창공을 자기 무대로 삼는 새들이 깃드는 나무, 온 세상을 포용할 만큼 크게 자라며, 반죽에 들어간 누룩이 반죽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한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확장되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루카복음서에서 이 자리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의 복음 선포 활동을 끝내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입니다. 갈릴래아에서뿐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도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지만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반긴 이들도 있었지만 예수님께 대한 반감 혹은 적대감도 더욱 커졌습니다.
이들 적대감을 가진 이들은 이른바 백성의 지도자급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군중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사이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활동에 관해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죽으러 예루살렘에 가신다고 하셨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이 굽은 여인을 고치신 일화에 이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성공에 관해 혹시라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제자들의 불안에 대해 안심하라고 하시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삶은 어떠한지요? 좋은 뜻과 좋은 마음으로 열심히 성실하고 노력하고 살아왔는데, 노력한 만큼의 결실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때로는 실패했다는 느낌마저 들 때는 없는지요? 그렇다고 중단하거나 좌절하지는 마십시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고 보이지 않는 누룩이 밀가루 서 말을 온통 부풀어오르게 하듯이 우리가 뿌린 씨는, 좋은 일을 위해 흘린 땀과 정성과 노력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열매를 맺고자 자라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2월 11일, 이창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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