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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갈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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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2-15 조회수4,386 추천수1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갈망하다

 

 

우리는 지난 호에서 왕국 후반기의 작은 성공으로 변방이 탄생했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표현이 늘어난 것을 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그 결과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구약 성경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고대 이스라엘에서 불의가 심해지자 정의를 갈망하는 마음이 늘어났음을 볼 수 있다.

 

 

날품팔이와 삯

 

왕국 후반기, 곧 기원전 7세기 이후에 ‘사키르’란 말이 자주 쓰였다. 수동 분사형인 이 말을 직역하면 ‘빌린’이다. 탈출기 손해 배상법에 ‘사키르’된(빌린, 세를 낸) 가축에 관한 규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탈출 22,13-14 참조), 이 말은 본디 짐승을 빌리는 데 사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왕국 후반기부터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빌리는 일에 이 말을 썼다. 하루 품삯을 주고 노동을 산 사람, 곧 ‘품팔이꾼’ 또는 ‘날품팔이’를 뜻했다(레위 19,13; 22,10; 25,6; 말라 3,5; 욥 7,1.2; 14,6). 사키르는 토지나 기술이 없이 하루 벌어 하루 살아야 하는 ‘빌린 사람들’을 가리켰다.

 

사키르의 품삯을 ‘사카르’라고 한다. 이 말도 7세기 이후 급증했다. 말라키 예언자는 사키르(품팔이꾼)의 사카르(품삯)를 떼어먹는 자를 거슬러 주님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예언한다(3,5 참조).

 

예레미야서에서 사키르는 ‘용병’으로 번역되는데(46,21), 일당을 받고 전쟁을 치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품삯을 벌려고 전쟁터까지 나가야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표현 급증

 

본디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는 전통적인 표현은 고아와 과부, 레위인 그리고 이방인이다. 예언자의 시대에는 여기에 더하여 ‘달’(가련한 사람), ‘에브욘’(멸시당하는 사람), ‘아니’(빼앗긴 사람), ‘오니’(고통), ‘아나브’(겸손한 사람), ‘사키르’(날품팔이)등의 표현과 성찰이 등장했다(지난 호 참조).

 

이런 표현은 저마다 독특한 느낌과 함의가 있는데, 모두 경제 용어이자 신학 용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말 성경은 이런 표현을 뒤섞어서 옮겼는데, 언젠가 이런 느낌과 의미를 잘 살려 번역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참고로, 이러한 낱말 가운데 사키르가 밑바닥 인생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말인 듯하다.

 

사키르에 대한 성찰은 신약 성경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등에서 일용 노동자들의 품삯을 언급하셨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급증하는 왕국 후반기에 사회적 현실은 어떠했을까? 구약성경을 읽어 보면, 사회적 분위기를 더 구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토지 독점과 가정의 해체

 

문제의 원인은 대토지 소유였다. 본디 하느님께서 모든 지파에 골고루 땅을 분배하셨지만, 왕국 후반기에 이스라엘의 토지는 왕족이나 고관, 군인과 대상 또는 종교인 등이 독점했다. 소수가 부동산을 독점하자 ‘빈익빈 부익부’가 한층 심해졌고, 사회적인 악습이 퍼져 나갔다. 성경은 그 과정을 낱낱이 전한다.

 

먼저 이사야 예언자는 무제한적 토지 독점을 고발한다. “빈 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해 가고 밭에 밭을 늘려 가는 자들! 너희만 이 땅 한가운데에서 살려 하는구나”(5,8). 그는 또한 “너희의 집은 가난한 이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가득하다.”며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원로들과 고관들에 대한 재판을 여신다.”(3,14)고 외쳤다.

 

부동산을 독점한 자들의 반대편에, 한 뼘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형편이 나아지기 힘든 이들이다. 오히려 먹고살고자 담보를 잡혀야 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결국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가난 때문에 가정이 해체되는 것이다. 미카 예언자는 가정이 해체되는 이런 현실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예를 영원히 빼앗아 버리는 것이라고 고발한다(2,9 참조).

 

 

흥청대는 상류층과 사법 정의의 붕괴

 

이런 현실에서 부와 권력을 독점한 상류층은 사치와 방탕에 빠졌다. 이사야 예언자는 상류층의 탈선을 날선 언어로 비판한다. “아침 일찍부터 독한 술을 찾아다니고, 저녁 늦게까지 술로 달아오르는 자들! 그들은 비파와 수금, 손북과 피리 소리와 더불어 술을 마셔 대면서”(5,11-12) 주님을 외면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경제적 불평등은 단순히 경제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극심한 불평등은 부를 독점한 측이나 부를 빼앗긴 측 모두의 영혼과 삶을 파괴한다.

 

주님의 길에서 일탈한 상류층은 사법체계를 주물렀다. 그들은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 하는 자들! 어둠을 빛으로 만들고, 빛을 어둠으로 만드는 자들! 쓴 것을 단 것으로 만들고, 단 것을 쓴 것으로 만드는 자들!”(5,20)이다. 그들은 독한 술을 섞어 마시며 “뇌물 때문에 죄인을 죄 없다 하고, 죄 없는 이들의 권리를 빼앗는 자들!”(5,23)이다.

 

이사야는 좋은 교육을 받고 비교적 높은 지위를 누렸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상류층의 일탈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체험했을 것 같다.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은 출신과 배경 등이 다양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이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파괴하는 과정을 하느님의 눈으로 소상히 전달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예언자의 신앙과 삶은 지금 우리에게 큰 귀감이다.

 

 

공정, 정의, 의인

 

예언자들은 경제 정의가 무너진 현실을 고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학적 성찰을 진전시켰다. 그들의 성찰에서 주님의 ‘미셔파트’와 ‘츠다카’, 곧 주님의 ‘공정’과 ‘정의’라는 단어가 점점 중요해졌다. 예언자들은 백성과 함께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미래를 열망했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공정과 정의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힘주어 고백했다.

 

빈부 격차 때문에 심화된 불의를 고발하는 구절에서 ‘주님의 공정과 정의’는 자주 나온다. 주님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이사 5,7)라는 구절은 이런 상황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말씀 같다.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 이 밖에도 보기를 많이 들 수 있다.

 

미셔파트와 츠다카라는 말은 언어학적으로 공통점이 깊다. 둘 다 기본적인 어근에서 파생하여 추상 명사로 발전한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언어에 담긴다. 대개 히브리어의 오래되고 기본적인 어근은 짧고 단순하며 소박한 의미를 전달한다.

 

하지만 역사와 사회가 발전하면서 기본적 어근에서 파생한 추상적인 말이 늘어난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 어떤 종류의 파생어가 새로 등장하고 증가했는지를 관찰하면 당대의 사회 변화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미셔파트와 츠다카가 중요해지는 본문을 통해 왕국 후반기의 사회상을 느낄 수 있다.

 

츠다카와 같은 어근으로 중첩형의 수동 분사형이 ‘찯디크’인데 ‘정의로운 사람’, 곧 ‘의인’이라고 번역한다. 아모스 예언자에 따르면 이런 불의한 사회에서 의인과 빈곤한 이는 함께 고통받는다(5,12 참조). 찯디크 또한 고도의 추상적 의미를 지닌 명사로서, 당대의 사회상을 전해 준다.

 

 

구원자 제도마저 무력화되고

 

본디 하느님 백성은 내부에서 심각한 차별을 경험하지 못했다. 아브라함 등 창세기 시대는 가족 단위로 움직였으니 인격적이고 친밀하며 소박한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집트 탈출과 광야 시기에는 모두 종살이하는 노예로서 특별히 가난하거나 부유한 이들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왕국이 성립되고 수백 년이 지나자 가난한 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급증했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사법 체계가 무너졌다. 가난한 이와 의인이 고통받는 세상에서 백성은 주님의 정의와 공정을 염원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매달릴 마지막 희망마저 작동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본디 ‘고엘’, 곧 ‘구원자’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셨다. 고엘의 사전적 정의는 ‘토지를 다시 사 주는 사람’이다. “너희 형제가 가난해져 자기 소유지를 팔 경우, 그에게 가장 가까운 구원자가 나서서 그 판 것을 되사야 한다”(레위 25,25).

 

일찍이 구원자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한 것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부동산의 지나친 쏠림을 제도적으로 막으려 한 것이다. 룻기(2,20; 3,9 등 참조)나 판관기(3,9 참조)의 이야기를 보면, 가난한 형제를 위해 토지를 다시 회복시켜 주는 것은 한 사람의 총체적 삶을 회복시켜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토지의 독점 때문에 고엘 제도마저 무력화되었다. 소수의 손에 토지가 독점되면, 토지를 잃은 사람은 급증하는 반면 그 토지를 사 줄 여유가 있는 친척은 얼마 남지 않게 된다. 고엘 제도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력’이 턱없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일부 학자는 오히려 고엘 제도의 악용을 추론한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자의 권리를 교묘히 악용하여 시간을 질질 끈다거나 값을 낮게 후려치는 등의 악한 사례도 급증했을 것으로 본다.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제도를 악용하여 이웃과 형제의 피땀을 쥐어짜는 사람들마저 존재했던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본디 백성에게 주신 평등한 토지 분배도 사라져 버리고, 그를 보완하여 지탱할 장치인 고엘 제도도 소용없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 백성이라는 공동체 자체가 존립의 위기를 맞는다.

 

 

새로운 삶과 신앙을 보여 준 예언자

 

경제적 불의는 경제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한계 때문에 하느님 백성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듯한 상황이 도래하였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희망의 불씨를 살려 주셨다. 일부 예언자는 하느님의 영에 따라 기득권을 내려놓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삶과 신앙의 양식을 보여 주었다.

 

다음 호에서는 그들의 모습에 좀 더 가까이 가 보자.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8년 2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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