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아가, 노래들의 노래13: 아름답고… 두렵고… 나도 몰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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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3 | 조회수3,605 | 추천수0 | |
아가, 노래들의 노래 (13) 아름답고… 두렵고… 나도 몰라
사랑에 빠진 여인이 “그이의 모든 것이 멋지답니다”(5,16)고 자랑스럽게 내세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리석음,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된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놀라운 힘을 지녔습니다. 연인을 꿰뚫어 보는 사랑의 눈길이 연인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보시니 모든 것이 좋았다’(창세 1,4.10.12.18.21.25.31 참조)고 하셨듯이, 사랑하는 이의 눈길은 연인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아냅니다.
그러면 사랑에 빠진 이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랑을 어떻게 체험할까요? 아가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젊은 아가씨의 관점에서 사랑의 부름에 응답하여 마침내 집을 나서게 되기까지의 체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아가 6,4-9.11-12은 그 아름다운 아가씨를 바라보며 사랑을 느끼는 연인의 속마음을 들려줍니다.
“나의 애인이여, 그대는 티르차처럼 아름답고”(6,4)
6,4의 첫머리에 나오는 “나의 애인이여, 그대는 … 아름답고”에 대해서, “내 친구야, 너 정말 예쁘구나!”라고 한 번역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4,1 참조). 아가에서는 찾음-만남-경탄-결합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여정’이 두 번 반복된다고 했지요. 5,2 이후에 줄거리가 다시 시작되었으니, “너 정말 예쁘구나!”라는 경탄도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6장의 경탄에서 새로운 점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티르차와 예루살렘에 비긴다는 것입니다. 티르차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겨가게 되지요. 한편 예루살렘은 남왕국 유다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니 티르차와 예루살렘을 함께 언급하면 그 둘은 남북 왕국 전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도시를 뜻하게 됩니다.
고대에는 도시를 여인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애가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여왕’이 ‘과부’로 전락했다고 비기기도 하지요(애가 1,1: 애가는 예루살렘을 한 여인처럼 나타내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여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책입니다). 아가에서는 역으로 여인을 도성에 비유했습니다. 2,4에서 여인은 사랑에 정복된 도시이고, 4,4에서는 탑과 방패로 무장한 성벽과 같습니다. 여인 편에서 이 ‘도성’의 비유는 자존감을,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연인은 도성과 같은 여인에게 오히려 매력을 느낍니다. 단번에 쉽게 넘어오지 않는, 쉽게 말하면 튕기는 여인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일부러 조금씩 튕기는 모습은 자신을 만만하게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지요. 그 여인을 바라보는 편에서도 그녀를 “티르차처럼 아름답고 예루살렘처럼 어여”(6,4)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도성 가운데에서 으뜸인 그 두 도시처럼, 애인은 모든 여인 가운데 뛰어납니다. 수도가 함락되면 그 나라는 전쟁에 패배하는 것입니다. 히즈키야 시대에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유다의 성읍 마흔여섯 개가 함락되었다고 하지만, 예루살렘이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기에 유다는 멸망을 면하지요. 마지막 보루, 난공불락의 요새. 여느 여인들과 달리 그만큼 정복하기 어렵고 매력 있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앞서 여인이 “나의 연인은 …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랍니다”(5,10)고 말했던 것처럼, 그 연인도 자기 애인이 “오직 하나”(6,9)라고 말합니다.
“나의 티 없는 여인은 오직 하나”(6,9)
솔로몬에게는 부인이 많았습니다. “왕비가 예순 명 후궁이 여든 명 궁녀는 수없이 많지만”(6,8)에 나오는 숫자는 솔로몬의 왕비나 후궁 숫자와 일치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구절이 우리에게 솔로몬을 연상시킵니다. 아가의 사랑은 솔로몬의 사랑과 대비됩니다(8,11-12 참조). 솔로몬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많은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과 달리, 아가의 사랑은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사랑입니다.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여인은 오직 하나”(6,9). 사랑은 숫자로 세어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라고 말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사랑이시기를 요구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 이스라엘이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속이 좁아서 그러실까요? 아닙니다.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유일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갈림 없는 사랑, 바로 그런 사랑이 아가의 두 연인이 서로에게 바치는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이며, 또 그런 사랑이라야 다른 어떤 사랑과 비길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랑은 나를 몽땅 걸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까지 자아낸다오”(6,4)
나를 몽땅 걸어야 하는 사랑이라…. 그런 사랑에 빠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사랑이 나보다 강하고, 나를 휘어잡고, 나를 위험에 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인을 바라보는 연인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여인이 너무 - 글자 그대로 지나치게 -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도성 같고 군대 같은 여인에게 매력을 느끼면서도, 사랑에 빠질까 두려워합니다.
구약성경의 토빗기에는 사랑하기를 두려워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빗의 아들 토비야입니다. 토비야는 라파엘 천사와 함께 먼 여행길에 오르는데, 중간에 라파엘 천사가 토비야에게 라구엘의 딸 사라와 결혼하라고 말합니다. 라구엘이 토빗의 친척이었기에, 토비야에게는 사라를 아내로 맞을 권리와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비야는 두려워합니다. 사라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신부와 관련된 관습에 따라 신랑이 사라와 한 몸이 되기도 전에,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그 남편들을 죽여 버렸”(토빗 3,8)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고대의 전설이 있습니다. 남녀가 결혼할 때에 거기에, 말하자면 액이 끼기 때문에 그 액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은 ‘악귀’나 ‘액’으로 사랑의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사랑하려는 순간에 느끼는, 악귀가 출현할 것 같은 두려움. 사랑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두려움! 그러나 토비야는 라파엘이 가르쳐 준 대로 기도의 힘으로, 그리고 라파엘이 처방해 준 방법으로 악귀를 몰아내고 사라와 결혼합니다. 사랑의 힘이 두려움을 이기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무모하고 어리석게 보일 뿐 아니라, 사랑을 하려는 당사자에게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연인은 “내게서 당신의 눈을 돌려 주오.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구려”(6,5)라고 말합니다. 어지럽게 만든다는 것은, 정신을 온통 혼란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사랑에 빠져 정신을 잃는 것이 두려우니 그 사랑의 눈길을 나에게 던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를 사랑에 홀리게 하지 말아 다오! 여기서 표현되는 것은 사랑의 엄청난 힘입니다. 인간은 무엇에 ‘당하는’ 듯 그 사랑의 힘을 체험합니다. 두려워서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의 힘에 굴복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인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6,12) 사랑으로 움직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6,12은 아가에서 번역하기 가장 어려운 구절이지만, 어떻든 12절의 첫 마디는 “나는 모른다/몰랐다”입니다. 사랑,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을 나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나’를 잃어버려 가면서, 나의 삶을 다른 사람이 좌우하게 만들면서, 나를 몽땅 내거는 사랑을 하는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도 모릅니다. 그것은 사랑이 나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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