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8: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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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3 | 조회수3,480 | 추천수0 | |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8)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3,27; 참조 3,21-31).
자랑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태도이다. 여러 종류의 자랑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랑은 내 삶의 토대가 어디에 있는 보여 준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율법을 믿는 유다인과 다른 종류의 자랑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내 삶의 구세주이심을 깨닫고 아들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을 자랑하라고 권고한다.
문맥 보기
바오로는 1,18-3,20에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유다인의 특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방인에게 자랑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1,18-3,20은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다룬 3,21-31을 준비하는 본문이다. 3,21-26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의로움을 설명하고, 3,27-31은 앞 단락의 내용을 토대로 결론을 내린다. 인간은 율법이 아니라 신앙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는 3,27-31이 앞 단락 3,21-26의 결론으로 소개되는 내용임을 알려 준다. 모든 인간이 죄를 지은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신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죄에 빠진 사람들을 한순간에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상실한 모든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시고, 죄의 종살이에서 풀려나게 하시며 죄를 용서하셨다. 이 새로운 삶이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이 행위로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새로운 방식이 알려졌다. 이것이 바오로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 자기가 한 일이라고 결코 자랑할 수 없다. 의로움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얻어지므로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자랑이라는 것은 자신을 칭찬하는 태도다. 자랑이란 당시의 유다인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이 지닌 공통된 죄다. 인간이 저지르는 그토록 많은 죄가 결국은 자랑과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3,27에서 경고하는 자랑은 구체적으로 유다인의 자랑을 가리킨다. 27ㄴ-28절에서 율법을 말하고, 대화 동반자가 유다인(2,17)이며, 29-30절에서 유다인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왜 유다인의 자랑이 나쁘다고 공격하는가? 자랑을 금지하는 이유는 인간적 이유 때문이다. 많은 유다인이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하느님께 어떤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하느님과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인간적 행위를 자랑하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오로는 2,1-3,20에서 강하게 거부한다. 모든 유다인이 그런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았지만 율법에 중심을 둔 유다인 사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바오로의 초점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한 행위의 해석학에 있다.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는 이미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시려는 것에 대한 인간의 적절한 반응, 즉 신앙이었다.
로마 교회의 유다계 보수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였고, 그분이 구약의 사제처럼 짐승이 아니라 당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바쳤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 그들의 주관적 신앙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신앙보다 율법에 집착하였다. 하느님의 은총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도 자신의 행위와 연결하였고, 그것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바오로가 보기에는 아직도 그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부족하였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인간이 적절하게 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를 비유는 신앙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바오로에게 ’신앙‘이란 단순히 사실을 아는 것, 객관적 지식의 차원이 아니었다. 신앙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삶이었다. 복음은 그것을 믿는 사람의 삶과 만나 가슴을 울릴 때, 삶을 바꿀 때 기쁜 소식으로 계시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한 일, 그분이 죄 많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아무리 잘 알고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해도 그분이 ’나에게 구세주‘가 아니면 신앙이 없는 것이다.
의화 신앙과 인간의 자랑
바오로는 행위의 법은 자랑을 부추기는 것으로, 신앙의 법은 자랑을 없애는 것으로 소개한다. 바오로는 모든 율법을 반대하지 않으며 율법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신앙을 통한 의화와 조화를 이룬다고 본다. 3,31에서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3,21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율법과 상관없이‘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율법의 윤리적 규칙을 지키는 데서 면제되며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의 뜻이 담긴 율법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떤 자랑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신앙을 통한 의화 교의를 선포한 후에,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로써 특히 종교적 형태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자랑이 깨졌다고 선언한다(1코린 1,29.31; 갈라 6,13 참조).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에게는 새로운 자랑이 주어졌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분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5,2.3.11)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바오로의 메시지는 자신의 힘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종교에게는 폭탄과 같다. 율법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경건함과 의로움을 자랑으로 삼았던 유다인이 바오로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이것 때문이다(로마 8,30-10,4 참조).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그리스도인도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할 때가 많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 가르친다.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을 자랑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마음에 무엇을 품고 이 인생을 질주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저 약하고 죄 많은 존재로 머무르지 않았을까? 세상에서 나를 과시할 수 있는 자랑거리를 찾아, 나의 갈망을 채워 줄 대상과 일을 찾아 무질서하게 애착하며 살지 않았을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이 내 삶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성령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삶의 구세주, 저의 모든 갈망을 채워 주시는 분임을 기도 중에 깨닫게 해 주십시오.”
* 임숙희 님은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로마서의 바오로 기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의 신앙과 영성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글쓰기와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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