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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께서는 왜 야곱 같은 사람을 택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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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6,253 추천수0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께서는 왜 야곱 같은 사람을 택하시나요?

 

 

* 창세기에서 야곱 이야기가 가장 많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삼촌 밑에서 고생한 끝에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형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니 ‘참 많이 변했구나, 성숙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찜찜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야곱 같은 사람을 택하시나요? 야곱 이야기에서 오늘의 신자들은 어떤 메시지를 읽을 수 있나요?(20대 진 효임 골룸바 님)

 

 

맞습니다. 야곱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가장 흥미진진하지요. 요셉 이야기는 매끈하긴 하지만, 울퉁불퉁한 삶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 인물은 단연 야곱이지요.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대할 때 자꾸 불편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야곱의 행실이 모범적이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런 그를 약속의 후계자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야곱은 창세기에서 인생 전체가 자세히 소개되는 첫 번째 사람입니다. 태아 때부터(창세 25,22-23 참조) 죽어(창세 49,33 참조) 묻힐 때까지(창세 50,13 참조) 그의 이야기는 창세기의 절반에 육박합니다. 이만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라는 점에 있겠지만, 동시에 그를 통해 선택된 자의 삶과 그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 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공정한가?

 

우리는 야곱을 잉태한 어머니 레베카가 받은 신탁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습니다.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창세 25,23). 야곱과 에사우의 인생이 신탁에 따라 이렇게 판가름되었다면 실제 인생의 흐름도 그럴 것이고, 그렇다면 성경도 사주팔자처럼 운명론을 따르는가 하고 의혹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신탁은 두 형제가 아니라 그들의 후손(겨레)의 운명을 밝힌 말씀입니다. 그것도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포괄하여 선언한 것이지 구체적 삶의 여정을 밝힌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드러나듯,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행위 하나하나에 관여하지 않으십니다(창세 22,12 참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분명히 이루어지지만 그 때와 방식은 미래에 열려 있습니다. 또 그분의 뜻이 관련자들의 행실에서 영향을 받긴 하지만 그것으로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야곱은 모태에서부터 우리네 일생처럼 갈등과 투쟁에 휩싸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동생으로 태어났기에 신탁에 따라 그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옹호하고 그의 행실을 변호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 이야기에서 레베카 외에는 아무도 이 신탁에 구애받지 않는 듯, 모두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기 뜻을 이루려고 애씁니다.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시종일관 에사우에게만 눈길을 줍니다. 에사우는 가훈과 부모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혼인하며 장자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맏이의 권리가 탄탄하게 보장된 가부장 사회에서 둘째 야곱은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속임수라도 써서 장자권을 얻고 축복을 받으려 발버둥 칩니다. 윤리 면에서 에사우와 야곱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 면에서 둘 다 약하고 불완전한 보통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란으로 도망가는 야곱을 찾아가 그를 약속의 후계자로 삼으십니다(창세 28,13-15 참조: 야곱의 인생 147년을 거꾸로 계산하면 이때 나이가 대략 77세로 삶의 후반전이 지난 뒤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그를 택하셨는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곱의 행실이 훌륭하거나 그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그분의 자유로운 은총의 행위입니다(신명 9,5-6 참조). 그분은 사회의 기득권이나 전통과 무관하게 당신의 사람을 선택하시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이 언제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그 선택에는 하느님께서 배반당하고 상처 입으실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늘 따릅니다.

 

 

우리의 변화를 기다리며 천천히 일하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 하여 그가 금방 의롭게 되고 그의 행실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삶의 환난과 고통과 갈등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선택된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꼭 있어야 합니다. 야곱에게도 20년 넘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베텔에서 하느님을 만난 뒤 하란에 가서 외삼촌 라반에게 거듭 속으면서 심한 차별과 억압을 받습니다. 또 라헬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새 가정을 이룹니다. 그 힘든 삶에서 자신과 동행하며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20년 동안 비틀렸던 야곱과 라반의 관계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일방적으로 불의하게 당하던 야곱이 당당하게 서고, 정당한 몫을 거두며, 화해의 잔치를 벌인 뒤 헤어지게 이끄십니다. 그 뜻은 야곱의 삶과 생각을 바로잡아 선택된 자로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받은 주님의 복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평화의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을 야뽁 강가에서 공격하신 뜻도 그러합니다.

 

그분은 강한 힘으로 야곱을 내리누르지 않고 밤새워 상대하시면서 복을 청하는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속이는 예전의 야곱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라는 요구입니다. 형과 이웃을 대하는 자세를 바꾸라는, 누구든 그와 씨름한 “어떤 사람”(창세 32,25)처럼 대하라는 명령입니다. 진짜 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변화입니다. 야곱은 더없이 낮은 자세로 형을 대하고 형에게 훔친 복을 돌려줍니다. 진정한 화해는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풍요롭습니다. 비틀거리며 바른길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삶의 역사와 모습을, 그리스도인은 선택된 이의 고단한 삶과 주님의 자비를 바라봅니다. 하느님 안에서 변화되지 못한 사람의 인간관계는 힘의 향방에 따라 쉽게 뒤틀립니다. 라반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던 야곱이 레아에게는 냉혹한 지배자가 되지 않습니까? 삶의 참된 변화, 관계의 변화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기만 한 죄인을 천천히 변화시켜 화해와 일치로 이끄시는 하느님, 지금도 그렇게 일하시는 그분의 손길이 혹시 자매님의 삶에도 함께하고 있지 않나요?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2월호(통권 453호), 이용결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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