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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의 숨은 이야기: 성경 속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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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638 추천수0

[성경의 숨은 이야기] 성경 속 숨바꼭질

 

 

성경 읽기는 숨바꼭질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요 주제가 아니라고 가벼이 훑던 구절이 어느 순간 ‘또렷이’ 다가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한편 강론에 연계할 만한 맞춤 구절이나 사연이 떠올라 확인할 때에 감쪽같이 숨어서 애간장을 태우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성경을 뒤적이다 지쳐 ‘포기할 때’의 안타까움이란…. 그런데 그 구절이 어느 날 ‘까꿍’ 하고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말 숨바꼭질하는 술래가 된 기분에 약이 오릅니다. 이제는 성경 구절을 찾다 지치면 술래로서 큰 소리로 외치고 싶기도 합니다. “못찾겠다. 꾀꼬리! 깽깽이 발로 나와라.”

 

오래전에 본 영화가 있습니다. 제목은 아리송하지만 몇 장면의 영상이 생생한 영화이지요. 주제는 예수님의 이집트 피난살이였습니다. 흙장난하는 예수가 흙으로 동물 모양을 빚으면 그 동물이 실제로 살아 움직입니다. 개와 새 모양의 흙덩이가 모두 생명이 됩니다. 창조주 하느님과 하나 되어 세상을 빚으신 예수님이니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제2경전’으로 분류된 외경에 빼곡하게 있습니다. 외경에는 구약의 예언자와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적 사건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증명처럼 읽힙니다.

 

그런데 영화 속의 어린 예수는 자기가 지닌 놀라운 능력 탓에 큰 곤욕을 겪습니다. 높은 데서 겁 없이 뛰어내리는 예수, 그런데도 말짱한 걸 보고서 또래가 마구 따라 합니다. 결국 친구들은 얼굴이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니, 이웃이 모두 ‘꼴통 예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습니다. 마침내 별종 예수를 몰아내기 위해 요셉을 닦달하기에 이르는데요. 이웃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예수와 같은 말썽꾸러기를 도저히 내 새끼와 지내게 할 수 없다며 당장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렇죠.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이방인 요셉과 마리아의 설움과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오죽이나 답답하면 아버지 요셉은 철딱서니라곤 없는 예수를 구석으로 끌고 가서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하고 알밤을 먹입니다. 꼭꼭 숨어 지내도 간 떨리는 판에, 천지도 모르고 나대는 철부지 예수를 염려하는 눈빛이 잊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의 비밀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많은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그런 기적의 힘을 기대합니다. 딱 한 번, 꼭 이번만이라도 ‘뚝딱’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달라고 갈망합니다. 또 감히 생각하지 못한, 기대치를 뛰어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때 ‘응답’이자 ‘복’인 줄로 오해합니다. 결국 기도 끝에 마음이 상합니다. 하느님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 주님의 불공평을 논합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제 마음대로 척척 기적을 일으키며 편하게 지냈으면서, 우리한테는 인색하다”고 푸념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편에서 ‘변명’을 하려 합니다. 그분께서 일으키신 기적의 비밀을 찾았습니다.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는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모두’ 해결해 주시지 못하는 심정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씁니다.

 

솔직히 저도 주님의 능력이 부러운 적이 많았습니다. 제자들에게 파스카 만찬 장소를 일러 주시는 장면을 하나의 이적으로 오해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세 복음서가 일제히 그 만찬 장소를 주님의 혜안에 따라 얻어진 듯 착각하게 한 것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거라. …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놓은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루카 22,10-12)라고 하니, ‘금 나와라 뚝딱!’ 하는 주문으로 들리는 것입니다(마태 26,18; 마르 14,13-15 참조). 너무나 유명한 그 사연, 매년 사순 시기마다 선포되는 말씀인데도 그 뜻을 살피지 못했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어느 날, 마태오 복음에서 묘한 뉘앙스를 감지했습니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려야 할지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마태 26,18)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아, 무, 개….’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 이름을 말씀하셨는데 성경이 익명으로 처리한 것이라 깨달았습니다. ‘왜? 무슨 이유로?’라는 의문은 복음서가 주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 기록된 것임을 생각해 볼 때 증폭되었지요.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데 굳이 아무개라고 기록한 곡절이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성경에 숨겨진 인물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또 하나의 기적

 

복음은 주님의 일을 도운 여인들의 이름을 곳곳에 기록합니다. 달랑 이름만 적힌 사람도 있고, 남편 직업까지 밝힌 이도 있으며, 일곱 귀신이 들린 과거지사가 들통 난 인물도 있습니다(루카 8,2-3 참조). 결론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데 남성 열두 제자뿐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여성 제자들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루카 8,2)라는 수식이 붙은 것을 볼 때, 그들 모두 예수님에 의해 병이 치유된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3)는 여인들의 헌신 덕에 주님의 공생활이 약간 수월했으리라 싶어, 그 배려에 새삼 두 손을 모으게 됩니다.

 

교회의 전승은 최후의 만찬이 거행된 다락방을 복음사가 마르코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마르코 가족의 신앙 계보가 가늠되는데요. 그날 주님께서 이르신 ‘아무개’가 마르코의 어머니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왜 마르코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답이 궁합니다. 바오로 사도와 함께한 ‘위로의 아들 바르나바’가 마르코의 사촌이었는데도 자꾸만 외가 쪽으로 무게를 싣는 것은 순전히 제 편견일 수 있다는 점을 밝히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루카 8,3)가 마르코의 어머니가 아닐까 짚어 보고 ‘수산나’일 수도 있다고 어림합니다. 물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루카 8,3)니 익명 처리를 원한 매우 겸손한 ‘어느 여인’ 중에 한 분이리라 헤아리기도 합니다.

 

딱 여기까지 적고 며칠 동안 원고를 다시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틈날 적마다 마르코 어머니의 인품을 생각하고 그의 행적을 더듬었습니다.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점에서 성모님처럼 아주 겸손한 분이라고 결론짓기도 했습니다. 원고를 다시 정리하던 날, 왠지 ‘바르나바와 마르코’가 사촌인지 외사촌인지 확인하지 않은 것이 찝찝했습니다. 유럽과 달리 친가와 외가를 분명히 구별하는 우리 정서에 촌수 확인은 필수다 싶던 것입니다. 그런데 ‘있을 만한 부분’을 뒤지고 ‘그럴 만한 얘기’를 아무리 훑어도 그 구절이 오리무중이었습니다. 군데군데 바르나바와 마르코의 이야기를 찾아도 촌수를 밝힌 구절이 ‘사라진’ 것입니다. ‘또 숨었구나.’ 한숨이 나오던 차에 통통 튀어 오르듯 제 눈길을 사로잡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사도 12,12). 그토록 궁금한 마르코 어머니의 이름이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러한 주님의 일깨움에 소름이 돋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또 하나의 기적이라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마르코의 어머니가 언제 주님을 만났는지, 어떤 사연으로 맺어졌는지조차 알아 낼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그날 ‘최후의 만찬’을 위한 자리가 ‘기적적으로’ 뚝딱,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듯 즉흥적으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뚜렷합니다.

 

마르코의 어머니가 성경이 꼭꼭 숨겨 놓은 또 다른 성인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성모님처럼 자신의 치적이나 선행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겸손한 인물이라는 점도 수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 마음을 먹는 중에 ‘쏘옥’ 숨은 ‘머리카락’이 보였습니다. “바르나바의 사촌 마르코”!(콜로 4,10)

 

묵주 기도 성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성인을 기억합니다. 부디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성모님을 닮은 겸손을 지니고 살아 ‘주님을 돕는’ 인물로 기록되기를 원해 봅니다. 훗날, ‘요한이라고 불리는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를 뵙고 오늘 이야기를 꺼내어 추억하리라 기대합니다. 더 많은 분이 성경에서 주님과 숨바꼭질하며 뛰노는 친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과 10여 년 뒹굴다가 ‘새 갈릴래아’인 김해 활천 성당 주임으로 옮겼다. 평화방송 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외 여러 책을 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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