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욥기 - 꼭대기까지 올라간 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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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4,888 | 추천수1 | |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욥기] 꼭대기까지 올라간 욥
욥이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산문에서 보이던 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네요. 예레미야 예언자가 자기 생일을 저주한 것처럼(예레 20,14-18 참조) 욥도 생일을 저주하고(3,1 참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3,11.20 참조). 욥은 마술이라도 걸어(3,8 참조) 달력에서 생일을 지우고 싶어 합니다(3,3 참조). 또 탄생의 빛이 어두워져 일식까지 그 어둠에 놀라 소스라치기를 바랍니다(3,5 참조). 빛을 창조하신 하느님(창세 1,3 참조)과 반대로 “차라리 암흑이 되어”(3,4) 버리라고 외칩니다. 죽기를 바랄 만큼 극심한 고통에 욥은 혼란에 빠집니다(3,26 참조). 빛과 생명은 그에게 더는 희망과 기쁨을 주지 않게 되었습니다(3,9.24 참조).
23,3 아, 그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기만 하면 그분의 거처까지 찾아가련마는.
“그분께서 내 앞을 지나가셔도 나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셔도 나는 그분을 알아채지 못하네”(9,11). 욥은 몸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큰 고통을 겪습니다. “어둠 앞에서 멸망해 가고 내 앞에는 암흑만 뒤덮여 있을 따름”(23,17)이라는 탄식은 하느님 부재를 겪는 위기의 표현입니다. 어둠과 극심한 절망에서 영적 위기에 처한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다가 하느님과 같아지고 맙니다. 저도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아무리 참고 기도해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제게는 안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참 어둡고 캄캄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속담처럼 욥의 탄식을 듣고 있던 세 친구는 그를 이리저리 털기 시작합니다. 결국 욥을 위로하러 온 셋이 한 사람을 두고 다투는 꼴이 되죠. 대화는 테만 사람 엘리파즈(4-5장; 15장; 22장 참조), 수아 사람 빌닷(8장; 18장; 25장 참조), 나아마 사람 초파르(11장; 20장 참조)와 욥이 번갈아 말을 주고 받는 세 개의 순환 형식으로 짜여 있습니다. 3장과 29-31장은 저주를 담은 욥의 탄식(독백)이고, 이 사이에 친구들과의 대화(4-27장 참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저주(29-31장 참조)에서는 하느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인정받고자 하는 욥의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31,35 참조). 욥이 무고 선언을 한 것은 도무지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친구들 때문입니다. 세 차례의 담론 중에 초파르의 마지막 말이 생략되었죠? 이것은 편집 과정에서 그의 말이 욥의 말로 바뀌었으리라 봅니다(J. L. 크렌쇼). 24,18-25; 26,5-14; 27,13-23은 욥의 말로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인과응보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4,7-11; 5,6; 8,11 참조). 연장자로 테만에서 온 엘리파즈는 욥이 너무 많은 악(22,5 참조)을 저질렀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욥에게 ‘인간이 하느님보다 의롭지도 결백하지도 않으며’(4,17 참조), ‘죄 없고 올곧다면 멸망하지 않으니’(4,7 참조) 자신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충고합니다(5,8 참조). 참 신심 깊은 사람이죠? 그러나 그의 말은 욥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도전받지 않을 전통적 가르침(A. F. 캠벨)을 지닌 엘리파즈는 종교적 신념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천막 끈이 끊어지고 지혜도 없이 죽어 간다’(4,21 참조)거나 ‘집안이 삽시간에 뿌리가 뽑힌다’(5,3 참조)는 말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욥에게 심한 고통과 충격을 줍니다. 인간을 낮추고 하느님을 높이는 데 익숙해져 있는 엘리파즈는(J. L. 크렌쇼) ‘하느님께서 꾸짖으시는 자는 행복하니 훈계를 물리치지 말라’(5,17 참조)고 하며, “아프게 하시지만 상처를 싸매 주시고 때리시지만 손수 치유해 주신다”(5,18)는 보편적 종교 상식으로 잘난 체를 합니다.
엘리파즈와 같은 견해를 가진 빌닷은 하느님께서 욥의 악을 제거하시기 위해 심판을 내리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난 세대를 들먹이며 욥의 아들들이 죄를 지었거나, 그의 결백과 옳음에 문제가 있거나, 하느님을 잊고 악행을 했다(8,4.6.8.20 참조)고 봅니다. 그는 ‘여인에게서 난 자가 결백할 수 없다’(25,4 참조)고 하며 꺼진 등불, 나무의 메마름, 질병과 죽음 등이 하느님의 심판이고 악을 없애는 수단이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초파르는 자신이 무고하다는 욥의 주장에 대하여 깨달음에는 양면이 있다고 합니다(11,6 참조). 그는 하느님께서 ‘욥의 죄를 잊기로 하셨다’고 주장하며 자기 생각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넘겨짚습니다.
요컨대 욥이 겪는 고통은 죄 때문(엘리파즈)이고, 여인에게서 난 자는 누구도 무죄할 수 없기에 욥에게도 죄가 있으며(빌닷), 하느님께서 스스로 의롭고 올곧다는 욥에게 더 적은 벌을 주셨다(초파르)고 합니다(A. F. 캠벨). 이러한 견해가 하느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는 원인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42,8 참조).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 봐야 하느님의 생각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께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13,7 자네들은 하느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고 그분을 위하여 허위를 말하려나?
욥으로서는 정말 미치고 펄쩍 뛸 노릇입니다. 욥은 “하느님을 제 손에 들고 다”(12,6)닌다며 친구들의 태도를 꼬집습니다. 또 자신의 고통을 전통 이론에 꿰맞추고 상상으로 죄를 만들어 내는 친구들에게 대꾸합니다. “거짓을 꾸며 내는 자들, 모두 돌팔이 의사들”(13,4)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네들은 유식한 백성이네. 자네들이 죽으면 지혜도 함께 죽겠구려”(12,2). 욥은 비정하게 삶의 원리와 원칙만을 앞세우는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마음이 점점 더 굳어집니다.
욥은 하느님께서 ‘흠이 없건 탓이 있건’ 무죄한 자와 죄인들을 똑같이 멸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9,22 참조). 그가 당하는 고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무죄한 이들의 절망을 비웃으신다(9,23 참조)고까지 합니다. 이러한 욥의 말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 18,23) 욥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셨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은 하느님께서 악의 세력들과 결탁하셨다(9,13 참조)고까지 생각하기에, 결국 하느님은 악을 행하시는 분이 되고 맙니다.
욥의 주장대로라면 하느님은 욥의 적대자이십니다. 그는 절대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능력을 알고 결코 하느님을 따를 수 없다(12,14-25 참조)는 것을 알기에 하느님과의 시비가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정당함을 입증하고 대변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입니다(16,18-21; 17,3 참조). 욥기에서 시비를 가릴 때 쓰인 히브리어 리브( )는 ‘싸우다, 변론하다’는 뜻으로 모두 열한 번(동사 일곱 번; 명사 네 번) 나옵니다. 이러한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40,8)고 꾸짖으십니다.
19,25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7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욥은 시비를 가려 줄 ‘고소인’(샤팟 shaphat)을 원하다가 하늘의 ‘증인’(에드 ed)이 계심을 확신하고, 마침내 자신을 되찾아 줄 살아계신 ‘구원자’(가알 )를 요청하기에 이릅니다(9,15; 16,19; 19,25 참조). 욥기에서 중개자의 개념은 “우리 둘 위에 손을 얹을 심판자”(9,33)라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욥이 무죄함을 주장하다가 드디어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하느님과 욥 자신을 일컫는 ‘우리 둘’이라는 표현은 욥이 하느님과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심판자’는 히브리어로 야카흐( )인데, ‘중개하다, 공의를 베풀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욥이 직접 ‘중개자’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네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개자’(리스 )는 영어로 mediator입니다. 이 말은 32장 이후에 혜성처럼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 엘리후가 사용합니다(33,23 참조). 욥의 무고 선언(31장 참조) 이후 하느님의 답변(38-41장 참조) 사이에 이스라엘 사람 엘리후의 이야기(32-37장 참조)가 나옵니다.
마침내 나타나신 하느님께서 질기고도 긴 욥의 고통을 어떻게 해방시켜 주실지는 다음 호에서 계속 보기로 하겠습니다. 욥이 고통 중에 하느님을 알아 가는 과정에서 겪는 영적 위기는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럴수록 주님을 사랑하며 믿고 따르는 지혜로 힘겨운 시간을 견디어 내야겠습니다.
* 김경랑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이다.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삶의 현장인 수지 가톨릭성서모임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열매 맺으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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