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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소예언서 읽기: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미카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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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304 추천수0

[소예언서 읽기]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미카 6,8)

 

 

수업 시간에 진도를 나가느라 미카 예언서를 자세히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제가 쓰는 방법이 미카 6,8만 한 번 읽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미카가 선포하는 내용 가운데 많은 부분은 다른 예언자들에게서 흔히 나오는 주제입니다. 그것은 억압, 폭력, 헛된 경신례 같은 고전적인 주제입니다. 그러나 미카 6,8은 예언서들의 정신을 놀랍게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고소하시고”(미카 6,2)

 

앞 단락을 보면, 6,1-5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고소하십니다. 이 단락은 예언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법정 논쟁으로 되어 있습니다. 피해자가 증인들 앞에서 상대방을 고발하여 시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는 산과 언덕들이 증인으로 호출되고(6,1 참조) 하느님께서 그들 앞에서 고소를 시작하십니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느냐?”(6,3) 여기서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느냐?”는 일반적으로 ‘내 잘못이 무엇이냐?’는 뜻이며, 혐의를 입은 사람이 하는 질문입니다(1사무 17,29 등 참조).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잘못했다는 것에 앞서 하느님께 잘못이 없음을 인정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고소에서는 하느님 편에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역사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은 이집트 탈출입니다. 언제나 그렇지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가장 큰 은혜는 “종살이하던 집”(6,4)에서 그들을 해방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영토를 정복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 언급됩니다. “모압 임금 발락이 무슨 계략을 꾸몄는지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이 그에게 무엇이라 대답하였는지”(6,5)는 민수 22-24장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모압 임금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라암을 불러 오지만, 발라암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일러 주시는 말씀에 따라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시팀에서 길갈에 이르기까지”(6,5),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이 가는 길에서 그들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대답해 보아라”(미카 6,3)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느냐?”(6,3)는 질문을 들으면, 성 금요일에 부르는 ‘비탄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첫 구절은 미카서의 말씀과 거의 같습니다. “내 백성아,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이어지는 가사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은혜를 저버린 데 대해 탄식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해 내셨지만, 그 백성은 구세주께 십자가를 마련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포도원을 마련해 주셨지만, 그 백성은 그분께 가장 쓴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구세주께 신 포도주를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다를 뚫어 주셨지만 그 백성은 하느님의 가슴을 창으로 뚫었고,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해 주신 그분을 빌라도 관저로 압송했습니다.

 

미카서의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고소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기보다 당신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더 근본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계명을 생각하기보다 그분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했다면 그들은 저절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고 모세의 율법을 주실 때부터 그 근거는 이집트 탈출이었습니다. 그분이 이스라엘을 해방해 주셨기에 이제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답게 자유와 해방을 보존하며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집트 땅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요. 하느님께서 해 주신 일을 기억한다면 이스라엘은 계명을 지킬 수 있고, 하느님을 잊어버릴 때에는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계명대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한다면, 제물을 얼마나 바쳐야 하는지 묻지 않을 것입니다. 제물을 많이 바치지 않아도, 아주 작은 제물 하나라도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제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에는 제물을 얼마만큼 바쳐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미카 6,6-7에 나오는 질문입니다.

 

 

“수천 마리 숫양이면 … 기뻐하시겠습니까?”(미카 6,7)

 

하느님께서 대답해 보라 하시니 이스라엘이 대답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잘못을 압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잊어버려 멀어진 그분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6,6 참조) ‘무엇을’이라는 질문은 상처 입은 관계를 물질적 선물로 되돌리려는 시도입니다. 재물로 하느님을 사려는 시도입니다. 점점 더 큰 선물을 제시하며, 이것이면 되겠느냐고 하느님께 묻습니다. 마치 경매를 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치면 되겠는지 묻습니다(6,6 참조). 다음에는 수천 마리 숫양을 제시합니다. 그 다음에는 만 개의 기름 강이면 기뻐하실지 묻습니다. 단순히 짐승을 잡아 바치는 제물의 양을 늘리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면 제 몸의 소생이라도, 맏아들이라도 내놓겠다고 합니다(6,7 참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그만큼 드리지 못한다는 듯 말합니다. 나는 정말 훌륭하고 착해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 주시면 그대로 드릴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는다는 듯이….

 

 

“사람아”(미카 6,8)

 

그렇게 둘러대는 인간에게 하느님께서 “사람아” 하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이기에 그렇게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6,8). 예언서의 구체적 맥락에서 보면 이미 모세의 율법을 통해 다 알려 주셨다는 뜻입니다. 모세 이후로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 이후 예언자들이 하는 일은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가 가르쳐 준 길에서 벗어날 때에 일깨우는 것이 예언자들의 역할이었습니다. 미카 6,8에서 알려 준 세 가지 사항 역시 이미 아는 그 지침들을 요약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 가운데 첫째는 공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공정을 실천한다는 것은 법질서를 존중하고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겠지만, 구약의 율법에서 공정은 ‘약자 보호’를 포함합니다. 하느님께서 뜻하신 질서는 인간의 논리를 넘어 소외된 이들의 권리를 찾아 주라는 요구입니다.

 

둘째는 신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신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세드(hesed)’인데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자비, 자애, 충실, 성실, 사랑 등 여러 의미로 옮길 수 있지만, 대략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충실한 것, 남에게 할 바를 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는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번역되는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늘 주의를 기울이며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세 가지 모두 길게 설명하자면 번역이 어렵고 개념도 복잡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짧게 설명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카 6,8에서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이미 다 말씀하셨고, 너는 이미 알고 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짧게 말하면,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J. L. 시크레(Sicre)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누가 내 이웃인지 묻는 복음의 율법 학자와 유사한 것이다(루카 10,29 참조). 지금의 경우라면 ‘헤세드’가 무엇인지, 성경에 그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그 동의어와 반의어는 무엇인지 물을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그것을 설명하려 하는 올가미에 빠진다. 그러나 그보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되풀이하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잊지 않고(6,5 참조) 그분 뜻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더 이상의 질문은 이를 실천하지 않기 위한 구실일 따름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4년 9월호(통권 462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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