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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7: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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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642 추천수0

요한의 고별 담화 묵상 (7)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평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주권으로, 동시에 깊은 내면성으로 말씀하신다. 이제 그분에게서 몇 가지 점을 이해해 보자.

 

 

‘평화’는 무엇인가?

 

평화의 의미는 평화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물어봄으로써 더 잘 알 수 있다. 악이 선보다 더 눈에 띄고, 파괴되는 것은 건설되는 것보다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인간 각자는 자기만의 고유한 본질을 지니며, 이 본질로부터 우리 현존재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이 성장한다. 각자는 자기 삶을 형성하며 자기 일을 하고 자기의 업적을 창조한다. 그렇지만 관건은 나 개인이 아니라 인간 현존재 전체에 대한 이해이다. 이렇게 무수히 다양한 각자의 행위에서 전체가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각자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이 질문에 대해 그때마다 ‘나’를 향해서는 ‘그렇다’고 응답하는 반면, 타인을 향해서는 ‘아니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것도 사리분별과 습관을 통해 고유한 ‘삶의 방식’이 형성되기 전에 처음 만날 때, 그가 다른 이에게 보이는 최초의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정되는, 초세기부터 유래한 용어가 있다. 바로 ‘타인’이다. 인간을 더 정확하게 알아볼수록, 아니 오히려 자신을 더 깊이 알게 될수록 타인이라는 말은 우리를 더욱 압박한다. 그 결과 ‘타인’은 우리에게 낯선 자, 원수, 악인으로 다가온다.

 

비록 우리가 악을 행할 가능성을 지니긴 했지만, 타인에 대한 감정을 고칠 때 비로소 평화를 향한 길이 열린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보편된 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 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이 말씀은 엄밀히 보자면 혁명의 시발점이다. “타인도 ‘나’이고 세계의 중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식하라. 그리고 너의 마음, 너의 시야, 너의 태도에 타인이 등장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라. 다시 말해 그 사람 안에서 ‘형제’를 보라.”

 

또 그분께서는 신비로운 진리를 알려 주셨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에게 행하는 모든 것이 그분께 행하는 것이 된다는 내용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신다(마태 25,35 이하 참조). 이제 ‘타인은 적이다’라는 본성적인 말은 ‘타인이 바로 나다!’라는 말로 변화한다. 우리가 이 문장을 의미 없이 죽은 문자로만 남겨두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만들려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듯이 타인 안에도 계신다. 그럴 때 모든 것이 변화한다.” 이로써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이기심에 반하는 질서는 사랑의 질서가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이다.

 

 

참된 평화는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인간은 스스로 평화롭지 못하다. 인간이 마음속에 품은 여러 가지 욕망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참되게 펼치는 것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욕망들은 서로 대치하며 마주하고 있다. 인간이 구체적 일을 하는 어떤 시점에서 실제 원하는 것은, 자기 안의 나태함으로 인해 무기력해지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고유한 자아 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혼란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깊이 알고 계신다. 우리가 자신에게 마음을 쓰는 것보다 더 마음을 쓰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며, 당신의 거룩한 의지와 당신의 창조력으로 우리의 선한 자아를 치유하여 하나가 되게 하고 평화를 이룩하신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7). 이 말씀의 배후에는 사도 바오로의 깊은 체험이 있다. 바오로는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광포한 모습으로 무절제하게 신자들을 쫓아갔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주님에 의해서 바닥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곧 주님에 의해 새 인간으로 태어났다.

 

집요하게 의로움에 대한 욕망을 좇던 그는 자기 힘으로 욕망의 혼란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다. 그가 저지른 폭력이 욕망을 고조시키지만 결국 폭력으로 인해 욕망이 추구하는 것을 망쳐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 6장에서 밝히듯, 그는 자신을 통해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며, 구원은 은총의 신비를 통해서야 비로소 주어진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체험한다.

 

그분이 누구신지 우리는 올바로 말할 수 없다. 체험해야만 그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이런 체험을 원하는 이에게 당신을 선사하신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 사람의 가장 내적인 마음을 건드리실 때, 그는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분의 모든 건드림은 비록 그 건드림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그분 자신을 내주시는 행위이다. 급기야 하느님은 ‘하나이며 모든 것’이시기에, 그분을 소유하는 이는 모든 것을 소유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당신 자신을 베풀어 달라고 청하려 한다. 그러면서 평화를 위해 서로 노력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듯 자신과 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는 깊이 상응한다. 우리가 본래의 자아, 시간성이 아니라 영원성의 관계에서 규정된 자아를 이해하게 된다면 말이다. 이렇게 온갖 차이와 대립이 있지만 나는 형제자매와 연대한다. 그래서 나에게 그들은 더 이상 낯설지도 않고 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로써 내가 그들에게 행하는 것이 내게서 성취된다. 내가 타인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거나 평화를 이룩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하거나 평화를 이룩하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년) 신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신학자요 종교 철학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그의 책 《Johanneische Botschaft》(Herder, 1966)의 일부를 김형수 신부가 옮긴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월호(통권 454호), 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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