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텃밭의 주인은 누구이신가? - 들을 준비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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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5,960 | 추천수0 | |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텃밭의 주인은 누구이신가? - 들을 준비 (1)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마르 4,13)
아버지는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저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면서 골목길 화단에 심긴 꽃나무가 뭔지 설명해 주시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배움의 순간인데 그 시절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시골에서 텃밭과 정원을 가꾸십니다. 정원에 핀 꽃과 나무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는 대상이 손자들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흙을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의 덕을 배웁니다. 하늘이 내려주시는 열매에 감사하는 연습을 흙은 끊임없이 되새기게 합니다. 내가 정원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첫 번째 비유로 소개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공관 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이 비유는 다른 비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비유는 청중에게 친숙하면서도 낯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같이 일상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뒤틀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청중이 기대하는 대답과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일상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뒤틀림의 지점을 지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뿌려진 비유의 말씀에 어떤 배움이 숨어 있을까요?
주의해서 지켜볼 점은 ‘봄’과 ‘들음’이라는 주제입니다. 예수님 시절에도 비유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이 많아 별도의 특별 수업이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데 실패하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전합니다. 실패도 하느님 계획의 일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성경 곳곳에는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요한 17,12 참조)이라고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악을 행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죄도 당신 계획의 일부로 포함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거부할 테지만(이사 6,9-10 참조) 하느님의 계획은 묵묵히 진행됩니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듣지 않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용감하게 응답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당신의 열매를 맺어 나가십니다.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하느님의 계획은 결국 완성된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제는 ‘듣는 사람의 자세, 마음의 문제’로 옮겨 갑니다. 비유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을 과감하게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농사 이야기로 흘려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관심의 차이입니다. 양심은 기초윤리 과목에서 자주 논의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오늘날 윤리신학자들은 양심 자체보다 양심 교육의 문제를 다룹니다. 마음의 혼탁함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기 마음속에 새겨 주신 법’을 인지하지 못하는 점을 다루는 것입니다. 양심 훈련이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인 양심에 인간이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각을 키우는 훈련입니다(<사목 헌장> 16항 참조). 그분은 말씀하셨지만, 들을 줄 모르는 인간이 닫힌 마음을 어떻게 열어 갈 것인지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가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강조하듯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루카 8,10)에 대한 반추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비유는 감추어진 하느님 나라의 비밀과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영적 눈먼 상태를 점검하게 할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배워 익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적용되고 열매 맺는 지점은 일상의 영적 감수성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마음의 감수성을 어떻게 키워 나가는지를 기억하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그래서 케빈 페로타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20 참조)의 제목을 이렇게 달아 놓았나 봅니다.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지난해 큰 반향을 일으킨 교황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는 “이혼과 동성애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이미 서적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일상에 적용해 나가며 영적 감수성을 ‘마음’으로 익히고 실천할까가 중요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나에게 어떤 도전으로 다가오는지를 알아채고 ‘듣는’ 연습에서 시작됩니다. 규범과 논리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는 ‘마음’의 텃밭을 잘 가꾸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자신을 돌아보도록 초대하는 단순한 권고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신다는 믿음의 근원적 선포입니다.” 곧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들었지만 그분이 활동하시도록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응답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번 달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마르 4,2-9과 10-20절에 등장하는 청자(聽者)가 다르다는 것(군중과 제자)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적 주제가 없는 농사 이야기인 것 같은 내용에 군중과 제자는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케빈 페로타가 언급하듯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청중이 응답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뒤틀림이 숨겨 있습니다. 질문을 발생시켜 스스로 반응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비유의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군중과 제자를 갈라놓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신은 나에게 와서 나를 따르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케빈 페로타의 ‘비유 6주간’ 중 첫 번째 주간의 일상에 ‘적용할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1) 한 사람이라도 복음과 소통하도록 도울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입니까? (2) 어떤 주석에 따르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세상 구석구석에 말씀을 뿌리신다는 점을 제안합니다. 복음화는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유치원생인 저에게 꽃말을 설명해 주시던 아버지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제가 길을 걸을 때마다 꽃나무를 알아볼 수 있던 것은 단순히 정보를 기억 세포에 저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 감수성이 훈련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철 따라 꽃나무의 상태를 알아보듯 하느님의 뜻을 느끼는 감수성의 정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데는 예민하면서 정작 제 마음의 텃밭을 갈고 닦아 주신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내가 누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실까요?
* 최성욱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200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미국 산타클라라 대학에서 성윤리를 전공하였으며,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리처드 M.굴라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제자 됨의 영성》(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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