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1,19-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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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6,943 | 추천수0 | |
[요한 복음서 해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1,19-34)
학교에서 일하다 보면 씁쓸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점수도 좋고 학업에 대한 열정이 높은 학생일수록 형편이 나은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접할 때다. 점수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런 저런 학생 활동이나 봉사 활동, 심지어 학우들끼리 따뜻한 우정을 쌓는 일에도 형편이 나은 집안 아이들이 독식하는 경향이 있다. 돈과 성적의 상관관계가 갈수록 분명해짐을 가슴 아프게 목도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지났다고들 한다. 강남에서 용 나고 부촌(富村)에서 용 나며, 개천에는 미꾸라지들이 있을 뿐이라고 한탄하는 시대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이루고 싶은 것은 결국 공부 잘하고 성공해서 돈 많이 버는 것일 텐데, 오늘 복음에서 들려오는 요한의 외마디, 곧 ‘아니요’는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과 같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와서 세례자 요한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요?”(1,19) 누구냐는 질문에 맞는 답은 “나는 누구다” 정도일 텐데, 요한의 답은 모두 “아니다”로 끝난다. 우리는 ‘아니요’가 만들어 내는 의미에 집중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아무것도 아니라 했기에 그를 외면할 일이 아니다. 무엇이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세례자 요한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인식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야기를 찬찬히 살펴보자.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먼저 와서 세례자 요한을 만난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아니요’라는 대답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을 테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력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성전을 중심으로 펼쳐진 유다 사회의 권력 체제는 그 이면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을 담보하고 있었다. 문제는 신앙의 희망과 현실 권력의 괴리였다. 메시아가 오면 성전은 끝이 난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 체제가 무너져 버린다. 메시아를 기다리되 메시아가 오면 끝나는 권력의 중심에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아니고, 메시아 시대를 알리려 미리 재림한다던 엘리야도 아니며(말라 3,23 참조), 모세와 같은 예언자도 아니라는 사실에(신명 18,15 참조) 그들은 자기 자리를 지켜 낼 수 있으리라고 안도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아니요’를 통해 제도 종교의 권력에서 벗어난다. 이를테면 세상의 권력에 이용당하는 신앙의 가치에 대해 ‘아니요’라고 분명히 선을 그은 셈이다. 제도 종교의 한계에 갇힐 그리스도를 증언하러 온 이가 세례자 요한은 아니라는 말이다.
바리사이들도 세례자 요한을 찾아온다. 율법의 수호자요 실천자임을 자처한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문제 삼는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세례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방법이자 필수 조건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맞이할 세상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끄는 데 있었다. 세례자 요한이 바라는 세상은 ‘어제’의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변화된 세상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기존의 세상이 믿고 규정한 ‘자격’을 문제 삼는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세례를 왜 베푸느냐고 문제시하면서 “세례를 베풀려면 이런 사람이어야지” 하고 다그친다.
‘아니요’로 자신을 규정한 세례자 요한은 바리사이들의 세상, 율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율법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할 그 ‘누구’를 찾으려는 바리사이들의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아무도 모르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은, 세상의 법칙과 논리에 젖은 이들에겐 ‘아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가 없다.
사실 요한 복음서는 유다인과 그들의 세상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덧붙여 유다인들이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 곧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사람이 되어 오신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데도 저희끼리의 전통과 제도, 권력 체제에 묶여 희망을 절망의 답답함으로 바꾸어 버린 사람들이 유다인이라고 요한 복음서는 생각했다.
요한 복음서가 쓰인 시대는 이미 성전 시대가 끝난 때였고,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 체제가 무너진 뒤였다(95년 이후). 성전의 자리에 율법과 그 율법을 가르치는 라삐들이 들어서면서 유다 사회는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다. 참된 이스라엘 백성으로 거듭나야 하는 시대의 요청에 유다 사회는 술렁였다. 요한 복음서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서 과거 권력의 상징인 사제와 레위인들, 현실의 새로운 권력인 바리사이들까지 모두 언급하고 유다 사회 전체를 조망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아니요’라는 대답과 대립각을 세운다. 이 세상은 ‘아니요’였고,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아니요’였다. 바로 여기에 세례자 요한의 존재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드러내는 방법은 ‘아니요’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저런 세상의 소리를 내려놓고 세상이 모르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예수님께서는 드러나셔야 한다. 세상이 규정할 수 있고, 세상이 원하는 존재가 그리스도라면 세상이 회개할 일도, 세상이 변화할 일도 없다. 모르는 존재를 찾아 나서려면 지금의 가치와 전통과 사상과 권력 같은 일련의 ‘익숙함’에서 벗어날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고 추구하는 데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것을 내려놓는 ‘비워 냄’을 위해 필요하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은 인류 역사 전체의 일이지만, 동시에 인류 역사를 뛰어넘는 일이어야 한다. 세상 안에서 살되 세상을 거스르는 일이어야 한다. 세상과 대화하되 세상에 ‘아니요’를 외치는 일이어야 한다. 세상의 ‘익숙함’에 퇴행적으로 머물러 그 허망한 쳇바퀴에 매몰되어 살지 말고, 한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 봄이 좋으리라.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 2009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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