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상상하라!(6,1-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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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6,582 | 추천수0 | |
[요한 복음서 해설] 상상하라!(6,1-15)
청년들이 힘들어한다. 3포세대니, 7포세대니 온통 절망과 포기의 아우성만 그들 속에 난무한다.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표되는 현실은 청년들의 희망을 애당초 거부하고 짓누른다. 청년들은 어른들이 저질러 놓은 현실의 처참함에 어떻게든 버텨 보지만, 어른들은 그런 청년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야’라는 잔인한 논리를 들이대며 현실을 외면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 현실을 장악한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교육’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모세가 하느님의 법을 받으러 시나이 산에 오르는 것을 연상시키고, 자리 잡고 앉으시는 것은 가르치는 이의 전형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요컨대 예수님은 지금 모세처럼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고자 하신다. 그 가르침이 청년들이 ‘헬조선’이라 부르는 이 나라, 이 땅에 어떤 의미로 새겨질지 자못 궁금하다.
예수님이 주도하시는 교육 방법은 ‘시험’을 통해서다. 그분이 필립보에게 던진 말씀은 하나의 선택을 불러일으킨다. ‘시험하다’는 뜻의 그리스 말 ‘페이라조(πειράζω)’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 받으실 때도 사용된 동사다(마태 4,1 참조). 그때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을 단호히 견뎌 내셨고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세상의 화려함을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이겨 내셨다. 어쩌면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셨을까. 세상의 화려함에 굴복하면서 남과의 비교 우위에 젖어 있는 우리 일상의 풍경은 예수님의 시험 풀이와 결이 다르지 않을까.
오늘 복음이 파스카와 가까운 때로 시간적 배경을 규정짓는 건 우연이 아니다. 성전 정화 사건에서 벌써 일 년이 지난 시간으로 오늘 복음은 우리를 초대한다(요한 복음은 삼 년에 걸쳐 파스카를 언급한다. 2,13; 6,4; 11,55; 13,1 참조). 파스카의 의미는 명확하다.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파스카는 해방과 자유의 가치를 이스라엘 민족 안에 확고히 심어 놓았다.
해방의 시간에 예수님은 ‘먹는 이야기’를 하신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자는 일상의 ‘필요함’을 통해 예수님은 필립보를 교육시키신다. 필립보는 세상의 ‘필요함’에 꽤나 충직했다. 큰돈이 있어야만 모두 먹일 수 있다고 미리 ‘계산’하는 필립보. 세상 이치에 참 밝은 편이고, 그것은 정당한 계산이었다. 안드레아는 어떨까.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음식은 수많은 군중에게 턱없이 부족한 양이기에 안드레아에게 있으나 마나 한 음식이다. 지금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계산이고 뭐고 가당찮은 양의 음식을 안드레아는 무시한다. 굳이 필립보와 안드레아를 탓하지는 말자. 이 두 제자의 말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다만, 예수님의 계산과 달랐을 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정당한(?)’ 계산을 거슬러 감사와 나눔을 보여 주신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빵은 가난의 상징이었고, 물고기 두 마리는 식사의 부족함을 더욱 부추긴다. 넉넉한 양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된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사실과 대비되는 이 결핍은 감사와 나눔의 가치에 대한 강조와 맞닿아 있다. 결핍의 자리에서 풍성함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예수님의 ‘자유로움에 기인한다. 세상적 가치 판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자유, 말하자면 적은 것에도 최고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비현실적 상상이다.
그런데 이 상상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상상이, 꿈이, 희망이 현실이란 이름으로 짓밟힌 시대, 취업을 못하고 돈이 없는 것을 개인이 잘못한 탓으로 돌리는 기막힌 현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이 아닐까. 상상을 해야 미래가 풍요롭다. 대개 사람들은 현실의 논리를 좇는 걸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 버릇은 현실을 진리 자체의 근거로 만들어 버리는 세뇌 작업으로 이어진다. 대기업에 취업해서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므로 그가 어찌 살든 ‘그만하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게 한 예다. 예수님은 적은 것, 소박한 것, 부족한 것을 풍요롭게 만드셨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아셨고, 그것으로 나눌 줄 아셨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 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적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은 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빵의 기적을 우린 종종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와 연결한다(2열왕 4,42-44 참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 이 하찮은 음식으로 장정만 오천 명 이상을 먹였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엘리야의 이야기와 중첩되어 되새김할 만하다. 두 이야기 모두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는 자유로움이 돋보이고, 그 자유로움은 하느님에 대한 의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 흐름을 요약하는 하나의 단어가 ‘감사’다. 감사를 표현하는 말로 요한은 다른 복음과 다르게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를 쓴다. 이 동사는 1세기 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성찬례를 떠올려 준다(마르 14,22-26; 1코린 11,23-25 참조). 이를테면 성찬례는 감사를 통한 풍요로움의 정신을 되새기는 일이 된다.
현실은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그러나 그 현실에서 누구보다 안정적인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을 오히려 즐긴다. 청년들을 경쟁의 사지에 몰아넣고 안정 속에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위 ‘가진 자’다. 우리나라 100대 기업이 취업 현장에서 책임진 이는 4%이나 그들이 가져가는 이익은 60%가 넘는다고 한다. 이런 사회는 정상적이지 않다. 더 움켜쥐려는 이들만의 세상은 비우고 감사할 줄 모른다. 비우고 감사하면 바보로 취급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을 바꿀 ‘교육’이 필요하다. 돈만 벌고, 가진 자를 닮아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는 세뇌 장치를 뜯어고칠 교육이 필요하다.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넉넉히 먹을 수 있는, 그래서 더불어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감사이고 나눔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입증해야 하고, 무자비한 경쟁의 승자만이 독식하는 세상을 정당하다고 외치는 이들의 무지함에 저항해야 한다. 현실 속에 노예로 살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깨고 뛰쳐나갈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또다시 시험을 내건다. 풀기 힘들지만, 함께라면 얼마든지 풀 수 있는 시험이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 2009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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