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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복음서 해설: 신앙 대 신념(6,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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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7,052 추천수0

[요한 복음서 해설] 신앙 대 신념(6,41-59)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곧 ‘육화’라는 개념이 요한 복음에선 자주 강조된다. 이는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과 가까운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서 인간과 하나가 되었고 참으로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요한 복음이 빵이라는 형상으로 예수님의 육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1세기 후반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인들과 겪은 갈등에서 비롯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어, 하느님은 처음부터 영원히 저 높디높은 하늘에 계셔야 한다는 논리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라는 사실(팩트 fact)은 ‘하느님은 인간이 될 리 없는 초월적 존재이시다’라는 인간의 철옹성 같은 신념 때문에 무시되거나 억압되었다.

 

사실, 신앙의 대상이나 내용은 늘 선명했고 올곧았다. 주님의 날, 주님과 하나 되는 날, 하느님에 의해 선택받는 날, 그날은 ‘모두가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사 54,13 참조)이라는 목적 아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갈망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데 늘 열심이었다. 하느님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상은 주로 예언서에 나타난다(이사 54,13; 예레 31,33-34 참조). 요한 복음은 예언서들이 약속한 하느님과의 만남이 예수님의 육화에서 이루어졌다고 이해한다. 예언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말이고, 그 완성을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는 표현으로 강변하는 것이다.

 

문제는 신앙이 없는 데에, 또는 하느님을 잊고 다른 신을 찾아 나서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예전부터 가져온 우리 신앙의 가치들에 매몰되어, 하느님이 안 계셔도 신앙만 있으면 그만인 것처럼 살아가는 맹신적 행태에 있다. 이를테면 이 시대에, 이 사회에 신앙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묻지 않은 채, 성당 가서 미사 드리고 신심활동 하는 것, 그것이 습관적인 일이 되어 버리는 것, 그래서 신앙과 그 대상인 하느님은 예전 내가 믿어 온 바, 교리 책에 적혀 있는 바, 딱 그만큼만 이해되는 것 등이 맹신적 행태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팩트’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실로 중요하다.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체험적 앎을 통해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선명히 각인하면 할수록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건 요원하다(6,42.52 참조). 신앙은 팩트 안에서 이해되고 성장한다. 다만, 팩트가 신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오늘 우리가 읽는 복음을 통해 익혀야 한다. 팩트는 인간의 해석에 따라 부분적 혹은 왜곡된 앎으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매번 보고 듣는 모든 팩트는 우리가 보고 싶고 듣고 싶어 하는 것들에 대한 욕망의 투사물인 경우가 많다. 보고 듣는 것을 뛰어넘는 데서 신앙은 시작한다. 유다인들은 만나를 통해 하느님을 기억하게 되고 인간적 배고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기에, 만나를 먹고도 죽은 것이 그들에겐 충격적인 팩트였다. 그 팩트는 오랜 역사 속에서 신념으로, 이데올로기로 길러지고 다듬어졌으며, 하느님께서 만나를 주셨다는 게 아니라 만나를 주셔야 하느님일 수 있다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하느님이 만나에 굴복하게 된 건 순전히 인간 신념의 고집 때문이고, 시대의 흐름 속에 하느님을 묻지 않고 신앙을 되짚지 않은 인간의 게으름 때문이다.

 

팩트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고 듣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보여 주고 들려주는 것은 보고 듣는 주체와 그 대상이 하나여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하느님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보고 하느님만이 그분을 제대로 들을 수 있다. 또한 하느님만이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들려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방법은 유일하고 동시에 완전한 것이다. “먹고 마셔라”며 스스로를 내놓는 방법으로 하느님은 인간과 하나 되었고, 그 하나 됨으로 하느님은 인간에게 완전히 들리고 보인다. 누군가에게 먹히고 마셔지는 것이 그 누군가를 배부르게 하지만, 그 배부름 이면에 하나의 희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먹히는 예수님은 자신을 ‘살’로 내놓으셨다. 이 ‘살’은 영성적 표현이 아니다. 구체적인 ‘살덩이’(사륵스 σάρξ)다.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것이 인간 상식으론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피를 마시는 건, 유다 율법상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 있는 범죄로 인식된다(레위 17,10-14 참조). 예수님은 인간의 인식과 신념, 그리고 상식을 뛰어넘는 곳에서 육화하셨다.

 

예수님의 육화는 2천 년 전의 유일회적 사건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신앙인 사이에 또다시 분명한 팩트로 이어진다. 요한 복음이 그것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은 1세기 말엽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찬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고, 그 성찬례를 오늘 우리가 계속 거행하기 때문이다. 6장 51.53.54절에서 ‘먹는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에스티오(ἐσθίω)’인데, 그리스어 동사 형태 중 ‘아오리스트형’으로 사용된다. 이 동사 형식은 어떠한 행위가 유일회적 혹은 결단적인 차원일 때 사용된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먹고 마시길, 지금 이 순간 결단하길 바라신다. 이어서 56절에서 먹는 행위는 ‘트로고(τρώγω)’로 달리 표현되는데,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한 번 먹고 마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육화와 죽음이 있는 그대로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는 동안 늘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의 육화와 죽음이라는 팩트가 우리 신앙인의 옹졸한 신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늘 살아 있는 실체로, 그 실체가 우리 신앙인을 통해 이 세상에 참된 생명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이 신이 있다, 없다 논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팩트’로서 계속해서 우리와 하나 되고 그것으로 하느님은 인간들 사이에 현존하신다. 인간의 신념이, 인간의 이데올로기가 이미 존재한, 그리고 존재하고 있는 하느님을 부정하거나 막아서지는 못한다. 인간은 저들끼리의 논리와 신념을 주고받는 데 혈안이 되기 쉽다. 거기엔 예수님의 육화나 죽음은 거부되거나 무시된다. 신앙은 논리와 신념의 유연성에서 시작한다. ‘이것만이다’라는 논리와 신념에 ‘왜? 다른 건 없어? 다른 건 안 돼?’라고 질문하기 시작할 때 신앙은 희망으로 싹튼다. … 필자는 이 글을 ‘필리버스터’가 한창인 우리나라 국회를 보면서, 그 국회를 연일 비난하는 대통령을 보면서, 그런 정치를 외면하고 피곤하다고 여기는 국민을 보면서 쓰고 있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4월호(통권 481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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