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마르코 복음서: 사랑이 최고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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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7,144 | 추천수0 | |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르코 복음서] 사랑이 최고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다. 아니, 그보다는 세상 어느 종교보다 사랑을 강조한다고 단정해도 좋을 법하다. 그런데 말이 쉬워 사랑이지 이를 실제 삶에 적용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에서 기치로 내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뜻의 박애博愛는 어떠한가? 혁명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오늘날 이는 허무한 말로 들리기 십상이다. 세계시민을 자처하는 유엔 사무총장이라면 혹시 가능할까, 일개 시민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박애의 적극적인 표현을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 할 때 말이다.
세계시민이 아닌 바엔 이웃부터 사랑하면 될 게 아니냐는 후속 질문이 가능한데, 이 역시 단순하지 않다.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고부간 갈등이라든가 유산 문제로 원수가 된 형제가 얼마나 많은가.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거기에다 나라 사랑, 지구 사랑, 환경 사랑 등으로 개념을 확대시키면 더더욱 사랑이라는 말이 낯설어진다. 그리스도교의 사랑도 자칫하면 추상적인 차원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이런 때는 사랑의 원조 격인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는 게 상책이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은 극적이었다. 나귀를 타고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그분은 곧바로 성전에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고,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었다. 때는 마침 파스카 축제 기간이라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교 베타니아에 기거하면서 매일 아침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그분을 노렸던 종교지도자들은(3,6)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 없었다. 도대체 성전에서조차 난동을 벌이는 자를 어떻게 허용할 수 있겠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14,1).
대낮에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다짜고짜 체포할순 없는 노릇이었다. 명실공히 메시아 칭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인물이었으니(11,9). 먼저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예수님의 명성에 흠집을 내야 했다. 확실한 방법은 종교적 · 사회적 ·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제기하고 답을 듣는 것이었다. 그 대답 중에 틀림없이 약점이 잡힐 테고, 이 상황을 목격한 군중은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체포, 처단하면 된다.
예수님에게 공개적인 질문을 던질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엇을 믿고 이렇게 나서는지 그분의 권한을 문제 삼았고(11,27-33),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를 제기했으며(12,13-17),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가르는 논쟁의 대척점인 부활 신앙을 빌미 삼았고(12,18-27), 메시아의 정통성에 시비를 걸었으며(12,35-40), 이번 호의 주제이기도 한 율법의 최고 계명을 가려내 보라(12,28-34) 했다. 사실 질문 하나하나가 매우 까다로워 길을 제대로 찾지 않으면 그들이 쳐놓은 덫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이제 어느 율법 학자가 예수님에게 묻는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12,28)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12,29-31).
잘 알려진 사랑의 이중계명이다. 하느님과 사람을 열심히 사랑하면, 모든 율법 조항을 - 예수님 시대에는 613가지로 이를 정리해 놓았는데 - 완벽하게 만족시킨다.
여기서 고려할 사실은 예수님이 베푼 가르침에 ‘사랑의 계명’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얼추 생각나는 것만 정리해도 내가 이웃에게 바라는 그대로 이웃에게 해 주라는 ‘황금률’(마태 7,12), 규정보다는 정신이라는 ‘율법 해석’(7,1-23),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본질을 밝힌 ‘행복론’(마태 5,3-12), 장차 다가올 하느님의 심판을 겨냥한 ‘종말론’(13장) 등이 있다. 실로 금쪽같은 가르침들이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에서는 ‘사랑의 계명’을 예수님의 가르침 중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율법학자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사랑의 계명’은 비단 마르코 복음에서 강조된 데 그치지 않고 신약성경 전반에서 널리 발견된다. 시리아 지역에서 집필된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 에페소에서 완성된 요한계 문헌, 소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며 쓴 바오로의 편지들인데, ‘사랑의 계명’이 지중해권 전역에서 거대 담론을 형성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수많은 종교의 각축장이었던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의 존재를 제국 내에 확실히 알리고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거기에 사랑에 대한 의미 추구 과정이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식 표상에서 벗어나 세계화의 길을 걷게 만드는 전기가 됐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하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12,33).
유다교는 신앙행위의 중심에 제사를 배치시켰다. 예루살렘 성전 순례와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제단에 바쳐 자신의 변함없는 하느님 공경을 다짐하는 게 유다인의 의무였다. 기원후 70년에 로마군의 성전 파괴로 더 이상 순례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된 후 지금까지도 유다인들은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언젠가 이 자리에 성전이 다시 세워질 날을 기대하며.
‘사랑의 계명’은 그리스도교가 세계화되는 초석이었다. 유다교와 구별되는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의 위대한 면은 바로 여기서 발견된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사랑을 최고의 자리에 놓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신앙으로서 자부심을 느껴 당당하게 세계를 상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세상의 도전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이렇게 구체화한 셈이다.
장미는 스스로 아름다움을 자랑하거나 자기에게서 나는 향기를 맡아 보라 하지 않는다. 구태여 사실을 전달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보수 신앙을 가진 어느 영국 여성이 선교의 필요성을 간디에게 강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간디는 장미의 넘치는 매력에 빗대어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설명했다.
오늘날 교회는 다시 한 번 도전을 받고 있다. 왜 세상이 이 모양으로 흘러가는지, 왜 그리스도교가 세상을 갈라놓는 데 앞장서는 인상을 주는지, 그리고 왜 이 시대가 그리스도교에서 내세우는 복음의 가치에 주목해야 하는지 답을 달라고….
“그리스도인이여, 한 떨기 장미처럼 스스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오!” 예수님의 명령이 천둥처럼 들려온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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