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마르코 복음서: 예수님의 경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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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5 | 조회수8,185 | 추천수0 | |
[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르코 복음서] 예수님의 경제관
지난 해 말부터 전 국민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있다. 최순실! 처음에는 그저 대통령의 비공식 자문 역할을 하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자세히 내막이 드러났다. 그녀는 대통령의 조용한 자문 역할에 만족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비선 실세였다. 온갖 인사를 마음대로 주물렀고, 딸의 장래를 위해 불법적인 힘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정부가 벌이는 사업에 빠짐없이 참여해 이권을 챙겼고,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쥐고 흔들었다. 언론에 비쳤던 세련된 옷차림과 광택 피부를 가진 대통령은 실은 그녀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최순실은 항변한다. 이 모든 게 대통령을 위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을 위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그녀의 말을 믿는 국민은 거의 없다.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최순실은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혹은 욕심을 통제하는 법을 어디서도 배워 본 적이 없었다고 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자매나 친구도 통제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불행하여라,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여!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다가왔다. 당시의 열악한 경제 사정을 고려할 때 그가 부자라는 사실은 금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옷 입은 모습에서 차이가 났고 체격도 남달랐다. 잘 먹고 잘사는 태가 물씬 풍겼다. 그 청년은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구한다. ‘영원한 생명’을 헬라어로 보면 ‘조에 아이오노에’이고, 하느님께서 종말 심판에 사용하실 각 사람의 치부책인 ‘생명(조에)의 책’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구원’이 연상된다. 즉, 부자 청년은 재물과 동시에 자신의 구원까지 챙기려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자 그는 울상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씀한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힘들다”(23절). 제자들이 반문하기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26절) 부자 청년의 질문이 구원을 겨냥한 것이기에 제자들 역시 ‘구원’을 입에 올린 셈이다.
이야기의 절정은 베드로의 등장에서 시작된다. 상황을 지켜본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읽기에 따라서는 수제자라는 사람이 품위 없이 나서는 것처럼 들린다. 다들 멀어져 가는 부자 청년의 슬픈 뒷모습을 바라보는 판국에 물색없이 나서서 잘난 체를 하다니. 이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놀랍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10,29-31).
예수님의 평가에는 다양한 말씀이 모여 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흔히 ‘단절어 집성문’이라고 하는데 복음서 작가가 여기저기서 모은 전승들을 주제에 맞게 열거하는 편집 방법을 일컫는다. 말하자면 베드로의 다짐을 빌미삼아 이와 관련된 예수님의 짧은 말씀들을 한 대목에 몰아넣는 것이다. 실제로 29절은 마르 3,31-35를 연상시키고, 30절은 1세기 그리스도교의 박해 상황을 그 뿌리로 삼으며, 31절은 예수님 당시 유행어였다(마태 19,30; 20,16; 루카 13,30). 그러니 편집 방법(단절어 집성문)을 고려해 볼 때, 마르코가 읽어 낸 예수님의 경제관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제자 공동체에 들어오라고 한다. 복음서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예수님 일행의 살림을 꾸리는 일은 제자단의 몫이었다. 제자들은 음식을 마련해 두어야 할 책임이 있었고(마태 16,5-7; 요한 4,31-33), 최후의 만찬을 할 장소와 음식을 준비할 임무를 맡았으며(14,12-16), 훗날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예수 일행의 자금을 관리했다(요한 12,6). 그리고 여성들의 역할도 중요한데 그녀들은 재산을 팔아 예수를 도왔고(루카 8,3), 예수의 시중을 들었으며(15,41),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러 무덤을 찾아갔다(16,1). 그런 제반 상황을 살펴볼 때 제자단은 예수님을 우두머리로 한 일종의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공동체 살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은 재산의 전적인 포기를 요구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일단 나누어 주고, 한동안 또 모은 다음 다시 나누어 주는 식이 아니라 아예 사유재산권의 포기를 선언했다. 베드로는 그 점을 분명히 했고 예수님은 포기할 대상에 가족까지 포함시켰다. ‘사유재산권의 포기’는 생활공동체의 경제원칙이었던 것이다. 마르코는 그렇게 부자 청년 이야기에 베드로를 섞어 넣음으로써 역사의 예수님이 갖고 있었던 경제관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다운 삶을 떠받치기 위한 대책 마련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인간은 세끼 밥과 입성과 비바람을 막아 줄 장소를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일단 내일 먹을 빵과 내일 입을 옷이 있어야 밤잠을 잘 수 있는 노릇이었다. 예수님 역시 인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제시한 원칙이 생활공동체였다. 나눌수록 점점 더 커지는 구원의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안정된 생활수준이라는 게 간단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로마 시대 말기로 갈수록 어마어마한 부자들이 등장했고 그들의 생활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침내 로마 귀족들에게 도덕적 붕괴가 찾아왔고 그들의 부는 제국이 멸망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우리 시대의 부자도 마찬가지다. 단단하고 품위 있는 악어 핸드백 하나를 소유하려면 우선 살아 있는 악어를 죽여야 하고, 뻣뻣한 가죽을 다스리려 독한 화학약품에 담가 두어야 하며, 아프리카 소년소녀의 작은 손으로 무두질을 해야 한다. 생명 파괴와 자연 파괴와 어린 노동력 착취가 이루어지고 만다.
간디는 예수님을 두고 위대한 경제학자라 불렀다. 특히, 예수님의 경제관은 시공을 초월해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돈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파고들어가 이권을 챙긴 최순실의 경우, 그 뒤에서 고통을 겪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 많은 사람의 상처를 보지 못했다.
실망한 채 돌아 간 부자 청년이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넘기고 예수님에게 다시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아마 예수님은 입을 맞추며 환영했을 테고 청년은 예수님의 공동체에서 난생 처음 자유를 맛보았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전하는 예수님 덕분에 세상은 더욱 풍요해졌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역시 예수님은 최고의 경제학자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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