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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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7-14 | 조회수9,305 | 추천수0 | |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룻
마태오 복음을 시작하는 예수님의 족보에는 43명의 남성 외에 다섯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타마르(창세 38장), 룻(룻기), 라합(여호 2장; 6,17-18.22-25), 우리야의 아내(밧 세바, 2사무 11장),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여인들입니다. 구약의 네 여인들은 이민족이지만, 하느님의 약속 –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는 ‘곧은 길’만이 아니라, ‘굽은 길’을 통해서도 당신의 말씀을 이루신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번에 만나 볼 사람은 이 네 여인 중 한 사람 룻입니다.
룻기는 판관기와 사무엘기 사이에 있는 짧은 이야기(7쪽 분량)입니다. 엘리멜렉(나의 하느님은 임금님)과 나오미(사랑스러운 여인)는 베들레헴(빵의 집)에 기근이 들어 먹고살고자 모압 땅으로 이주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이 만난 것은 죽음입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 마흘룐과 킬욘(병자와 약골)마저 죽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떠나라고 합니다. 오르파(등돌린 여인)는 떠나지만, 룻(동반하는 여인)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옵니다. 보리 수확철에 도착한 룻은 추수밭의 이삭을 주워 생계를 해결하려 합니다. 거기서 부유한 ‘구원자’ 보아즈(그 사람 안에 힘이 있다)를 만나고, 추수가 끝나는 날 룻은 그에게 자신을 받아줄 것을 청합니다. 보아즈는 율법에 따라 공개적인 법적 절차를 거쳐 룻을 맞아들이고, 그 둘 사이에서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이 태어납니다. 풍요로운 수확과 결혼, 그리고 아이의 탄생까지 베들레헴은 생명의 땅으로 드러납니다.
룻의 이야기 안에는 여러 율법의 규정들에 대한 해석들이 담겨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관련되어 수확철에 떨어진 이삭과 관련된 규정(레위 19,9-10; 23,22; 룻 2,8-16)의 실천이 룻과 보아즈가 만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룻은 본래 모압인입니다. 모압인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창세 19,30-38)이라고 하지만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고(민수 22,1-21), 우상을 섬기도록 유혹한 이들(민수 25,1-18)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앞에 모이는 집회에 나올 수 없는 이들입니다(신명 23,3-4). 그런데 룻은 그러한 규정들을 뛰어넘어 이스라엘의 위대한 임금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이것은 수혼법(嫂婚法 Levirate law, 형이 자손 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를 맞아 후손을 이어주는 법; 신명 25,5-10; 참조 마태 22,23-33과 병행구절)에 따라 보아즈가 룻을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룻 4,1-17).
이러한 율법의 재해석들은 룻기를 단순히 과거의 한 사건을 전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룻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상징적이라는 점, 1장과 4장이 테두리를 형성하고 2장과 3장이 유사한 구성을 보인다는 점, 바닥까지 다다른 나오미와 룻의 상황이 이야기의 시작이 되고, 보아즈가 등장하며 급작스런 전환을 이룬 후에, 절정에 이르자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고 짧은 종결문으로 끝난다는 점 등을 들어 이 소책자를 일종의 ‘단편소설’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이 책이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에 등장해, 당시 주류를 형성하던 ‘순혈주의’와 그에 따른 외국인과의 교류와 결혼에 대한 반대(에즈 10장; 느헤 13장), 곧 ‘배타적인 이스라엘 공동체론’에 대해 공공연한 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으로 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50년 가까운 시간(기원전 587-538년) 동안 바빌론 유배기를 지내고 다시금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그 땅에 50년 가까이 살고 있던 이들과 외국에서 들어온 이들 사이에 땅의 상속에 대한 문제, 이민족과의 결혼으로 만들어진 가정과 그 자녀들의 처리문제, 할례나 음식 규정의 실천, 총독이 다스리는 식민지 상황에서의 사회공동체의 기초에 대한 문제 등, 한 마디로 ‘누가 이스라엘인가?’라는 물음 앞에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었습니다.)
한편, 유다인들은 이 룻기를 수확철에 맞는 축제, 주간절(오순절)에 봉독합니다. 레위 23,15-22의 주간절 규정은, 이 축제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율법과 규정들에 충실하게 사는 길은 이웃사랑에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룻기를 읽다 보면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곁을 떠나라는 나오미에게 룻이 하는 말,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 1,16)는 눈물을 흘리며 껴안고 있는 여인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보리 이삭을 줍는 장면은 장-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을 떠오르게도 합니다. 그런데 더 인상적인 것은 이 책 어디에도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이나 천사를 통한 간접적 개입을 묘사하는 장면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선한 의지를 지닌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이들은 말끝마다 주님을 찾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주님의 규정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1,8.9.17; 2,4.12.20; 3,10.13; 4,11.12.14). 그리고 그 축복의 주인공이 됩니다.
룻기는 우리에게 여성과 가난한 이들의 권리와 사회적 책무에 대해, 특히 난민과 이주민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기근으로 모압으로 갔던 엘리멜렉, 남편과 아들들을 잃고 땅에 대한 상속권을 잃어버린 나오미, 인종과 종교가 전혀 다른 땅으로 이주한 여인 룻, 그들은 터전 없이 사는 이들이며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 재산도 힘도 권리도 아무것도 없던 나오미와 룻이 기본적인 양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보아즈와 베들레헴 주민들의 차별 없는 배려 덕분이었습니다. 난민이요 이주민인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누리도록 이미 터를 잡고 사는 이들이 먼저 나서서 구체적으로 다가갔기 때문입니다. 룻기가 배타적인 공동체에 경종을 울리는 큰 목소리가 되었듯이, 지금 우리 사회의 잘못된 배타주의에 맞서 저항의 소리를 내야 하는 이들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2018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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