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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삼손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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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06 조회수7,960 추천수0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삼손의 비극

 

 

세상에는 자기를 잊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욕편정에서 멀어지기 시작해야만 모든 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열린 눈으로 보면 나의 살아있음이 귀하고 주어진 모든 인연과 존재가 소중하고 고맙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자기 존재의 귀함을 알아보지 못했던 한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귀한 우리 인생을 값지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사십 년 동안 필리스티아의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날 인물은 필리스티아와 이스라엘의 경계에 자리잡은 단 지파 출신입니다. 이스라엘을 압박하던 나라와 마주한 단 지파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성경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판관 13,1 참조). 그런데 판관기 저자의 신학적인 도식대로라면 이 정도의 억압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이 당연히 하느님께 울부짖어야 할 터인데, 판관기 13장에는 하느님께 울부짖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절망이 너무 깊었던 탓일까요? 아니면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하느님께 부르짖을 이가 아무도 없을 만큼 이 시대의 죄악이 깊었던 까닭일까요? 아무튼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편에서 먼저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차마 그들의 고통을 두고 보실 수 없으셨나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는 단 지파의 한 아기의 탄생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 아기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어머니에게서 기적적으로 태어납니다(판관 13,2). 아기의 잉태가 하느님의 기적으로 이루어진 만큼 이 아기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특별한 구원 계획을 펼치실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 아기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며,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입니다(13,5). 짐작하시겠지만 이 아기는 삼손입니다. 삼손이 자라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주님의 영은 ‘단의 진영’에 있던 삼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13,25).

 

그런데 판관기 14-16장에 걸쳐 보도되는 삼손의 이야기는 짐짓 거창해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탄생에 비해 사뭇 실망스럽습니다. 그가 필리스티아인들을 상대하여 싸우게 된 것은 고통받는 민족을 억압에서 구원하려는 고결한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모두 삼손의 개인사와 연관되어 발생한 일들이었습니다.

 

삼손은 팀나의 한 필리스티아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탐탁지 않았지만 기어이 그 여인을 아내로 맞으려는 아들 때문에 아들의 약혼을 위해 필리스티아로 내려갑니다. 판관기의 저자는 ‘필리스티아인들을 치실 구실을 찾기 위해’ 하느님께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14,5 참조). 하느님께서 이런 일을 꾸미셨다기보다는 삼손의 성정을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삼손은 팀나로 내려가던 길에 포도밭에 들어갔다가 사자를 만나 맨 손으로 찢어 죽입니다. 그는 이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습니다(14,6 참조). 나지르인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 다시 팀나로 내려가는 길에 삼손은 가던 길을 벗어나 그 포도밭에 들어갔다가 죽은 사자의 시체에 벌집이 있는 것을 보고, 시체 부정을 피해야 하는 나지르인의 서원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꿀을 따먹고 부모에게도 가져다줍니다. 물론 꿀의 출처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14,9).

 

혼인 잔치 때에는 잔치에 참석한 서른 명의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속옷 서른 벌과 예복 서른 벌을 걸고 수수께끼를 냅니다(14,14 참조). 필리스티아인들이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답을 알아내자 삼손은 아스클론으로 내려가 서른 명의 필리스티아인들을 죽여 그들의 옷을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주고는 화를 내며 자기 아버지 집으로 올라갔고, 삼손의 아내는 들러리를 섰던 이의 아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밀 수확기에 아내를 찾아갔던 삼손은 아내가 다른 이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불같이 화를 내며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에 횃불을 달아서 필리스티아인들의 곡식밭으로 내몰았습니다. 이에 분개한 필리스티아인들이 삼손의 아내와 그녀의 아버지를 불태워버리자 삼손은 닥치는 대로 필리스티아인들을 쳐 죽이고 에탐 바위로 물러났습니다. 삼손의 부주의함이 가져온 끔찍한 고통과 불행은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필리스티아인들은 삼손을 잡기 위해 유다인들의 성읍인 르히를 습격하였고, 그곳에서 삼손은 싱싱한 당나귀 턱뼈 하나를 주워 필리스티아인 천 명을 죽입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이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삼손은 가자의 창녀를 찾아갑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새벽녘에 그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삼손은 한밤중에 가자 성문의 두 문짝과 양쪽 문설주를 빗장째 뽑아 어깨에 메고, 백오십 리나 떨어진 헤브론 맞은쪽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이 창녀의 운명에 대해서는 전해주지 않지만 그 여인 또한 동료 필리스티아인들로부터 몹쓸 짓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삼손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 번째 여인은 소렉 골짜기에 사는 들릴라입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안 필리스티아의 다섯 군주들은 들릴라를 찾아가 삼손의 힘의 비결을 알아내면 각각 은 천백 세켈씩을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날마다 졸라대는 들릴라의 성화를 못 이긴 삼손은 힘의 비밀을 누설하였고,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나지르인의 서원마저 어기게 됩니다. 삼손이 잠든 사이에 머리칼은 잘려 나갔고, 힘도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삼손의 두 눈을 뽑고 가자로 끌고 가서 청동사슬로 묶고, 감옥에서 연자매를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삼손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신 다곤 신의 제사를 바치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축제로 마음이 흥겨워진 그들은 삼손의 재주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신전에는 필리스티아 제후들과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옥상에도 삼천 여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눈먼 삼손은 사슬에 묶인 채 두 기둥 사이에 서서 다시 한 번 힘을 주시어 자신의 두 눈에 대한 복수를 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16,28). 그리고 힘껏 기둥을 밀어 신전을 무너뜨립니다. 삼손의 가족들은 무너진 신전의 잔해 속에서 그의 시신을 거두어 아버지 마노아의 무덤에 장사지냅니다.

 

역사가는 ‘삼손은 죽으면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은 필리스티아인들을 죽였다’는 말로 그의 생애를 요약하지만 우리에게는 그의 죽음이 비극으로 다가옵니다. 그가 조금만 다르게 살았더라면 그의 생이 이토록 안타깝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신분에 대해 진지하게 의식하며 살지 않았고, 나지르인 서원의 규정을 다 어겼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판관이었지만 이스라엘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든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죽음조차도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단 지파는 필리스티아인들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상속받은 땅에서 살지 못한 채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야만 했습니다(판관 18장 참조).

 

삼손의 진짜 비극은 비참한 죽음에 있기보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헌신하는 데서 오는 참기쁨을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받았으나 그 많은 것이 이웃 안에 맺게 될 놀랍고도 풍성한 결실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놀라운 힘은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 안에 매몰된 이들은 찾을 수 없는 파랑새와 같습니다. 그는 그 큰 힘으로 자신의 것 중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하였습니다. 팀나의 여인도, 나지르인 서원도, 들릴라도, 그의 두 눈도, 목숨도 지켜내지 못하였습니다. 훨씬 더 큰일을 해낼 역량이 있었지만 자신 안에 갇혀 그 역량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임을 믿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나의 미소가 한 사람의 세상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낼 수 있음을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듯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존재일지 모릅니다.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지만 않다면 말입니다.

 

* 김영선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수도자로,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생활성서, 2018년 8월호, 김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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