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의 창조는 공동체를 목표로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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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10-11 | 조회수7,553 | 추천수0 |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의 창조는 공동체를 목표로 한다(Gott erschafft auf Gemeinschaft hin)
창세기 2장 4ㄴ절에서 25절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다음, 에덴동산에 거처를 마련해주십니다. 이어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여자를 만들어주십니다. 사람을 깊은 잠에 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는 이것으로 여자를 지으시지요(연중 제27주일 나해 제1독서 참조).
제가 열 살 때는, 하느님이 마치 외과의사처럼 아담의 갈빗대를 잘라내시는 이야기가 우습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이야기에 경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를 순진한 아이처럼 이해하지도, 그렇다고 근본주의자처럼 이해하지도 않습니다.
창세기 2장 4ㄴ절에서 25절의 말씀을 역사적 보도로 받아들이는 근본주의적 해석은 하느님을 마치 외과의사나 마취과 전문의로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 이야기를 본질에 부합하게 정확히 이해할 놀라운 자유가 있습니다. 곧 이 이야기의 표상들은 정말로 그대로 ‘표상들’로 받아들여도 됩니다. 바로 그렇게 해서만 이 이야기의 힘과 진리가 밝히 드러납니다.
성경의 첫머리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창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4ㄱ절이고, 다른 하나는 2장 4ㄴ절에서 25절입니다. 이 두 이야기를 역사적 보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진화론적 현상과 풀릴 수 없는 모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예전에 잉글랜드 우스터(Worcester)의 성공회 주교의 아내가 찰스 다윈과 그가 새롭게 내놓은 진화론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맙소사, 하느님! 사실이 아니게 해주세요. 만일 사실이라면, 적어도 알려지지 않게 해주세요.”
이런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요.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표상적 언어’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진화론에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신비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
창세기 2장의 탁월한 표상 가운데 하나를 살펴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Adám)에게 ‘협력자’를 만들어주시기 위해 흙으로 온갖 동물을 빚으십니다. 사람에게 ‘알맞으며’ 사람의 외로움을 없애줄 협력자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이 동물들을 차례로 하나하나,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새를 사람에게 데려가십니다(창세 2,19 참조). 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마지막 목적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생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줍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질서를 지우고, 그렇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 생물들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만듭니다. 개념을 통해 세상을 파악하고, 그렇게 해서 세상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 생물들 가운데서 자신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를 ‘표상’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이 표상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시다니요! 하느님께서는 일종의 실험을 하시고, 성공하지 못하는 시도를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의 이 이야기는 진화의 사건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진화는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만, 도중에는 여러 ‘시도와 오류’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이야기는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이 온갖 동물들 가운데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했다면, 무엇보다 이는 사람이 동물과는 다른 존재이며 그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유전체가 침팬지의 유전체와 98% 동일하다는 유전학자들의 말은 옳습니다. 하지만 자연과학자들은 하느님의 영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한처음에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한 세상을 감싸고 그 위를 감돌고 있던 영을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표상적 언어로 말하면, 사람에게 불어넣으셨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설정한 한계를 지켜야 하고, 이 때문에도 하느님의 영에 대해서는 결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동물들과는 당신이 이루고자 하신 본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과 ‘동등한’ 존재 말입니다. 이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옮기면, 사람은 아직 공동체적 존재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다시 말하면, 족속을 이루어 살고, 무리 지어 포효하고, 떼로 사냥을 한다 하더라도, 인격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지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십니다. 그리고 그를 사람(Adám)에게 데려오십니다. 그러자 사람에게서 기쁨의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그의 말은 히브리어로는 단조롭게 이어지던 산문에서 갑자기 시적인 운율의 형태로 바뀝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여성해방주의의 입장은 이런 식의 표현에 불만이 아주 많습니다. 지배하려는 남자의 욕구와 최악의 가부장적 흔적을 여기서 읽어냅니다. 먼저 남자가 있었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에서 나왔다는 말이야말로 남자의 교만한 우월적 감정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 맥락을 바탕으로 이 말씀을 읽을 수 있지요. 첫 번째 창조의 이야기(창세 1,1-2,4ㄱ)가 이미 전체적으로 창조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남자의 우월성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저 간결하게 이렇게 말하지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그밖에, 여자가 남자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말이 곧바로 성 대결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유다교의 한 주석이 본질에 더 가까운 설명을 들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자를 남자의 머리에서 창조하지 않으셨다.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또 남자의 발끝에서 여자를 창조하지도 않으셨다. 여자가 남자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하느님은 여자를 남자의 심장 곁에 있는 옆구리에서 창조하신 것이다.” 게다가 이어지는 성경 말씀은 “여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남편과 결합한다.”고 하지 않고,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라고 말합니다.
사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의 마무리격인 이 말씀만이 아니라 이 이야기 전체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지닙니다. 첫 부분에 나오는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라는 말씀 역시 얼마나 놀라운 깊이를 지녔는지 모릅니다.
이 내용을 오늘날 우리는 옛 표상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좀 더 추상적이고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곧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질이 인간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물질에 부여하셨다. 그렇게 되는 데에 수억 년이 걸린다 하더라도 그리하신 것이다. 이 일은 물질의 자립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인간 안에 스스로를 인식하는 정신이 형성될 때까지 필요한 모든 시간을 허락하신다.”
협력자가 필요한 인간
다시 한 번 창조의 두 번째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생명체로 만드셨다는 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체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에게 동물이 협력자로 충분했을 테지요. 인간은 타자인 ‘너’와의 공동체를 통해 비로소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존재입니다. 이를 말해주는 것이, 하느님께서 여자를 남자의 옆구리에서 창조하셨다는 말씀과 여자를 하느님께서 몸소 남자에게 데려가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남자에게서 터져 나온 외침도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외침은 지배자의 포효가 아니라 기쁨의 환호입니다. 표상적 언어로 된 이 말씀은, 인간됨이란 서로 함께함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주고받는 협력에서 오는 기쁨과 신뢰 가운데 서로 함께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됩니다.
물론 방금 한 말들이야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을 보면, 삶이란 ‘신뢰 가운데 서로 함께함’이라는 말이 무색합니다. 풀밭에서 벌레를 찾는 새조차도 끊임없이 사방을 살피며 ‘안전’을 확인합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불신의 전형이지요. 신뢰는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통과 희생을 통해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분명, 성경 첫머리에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를 흘러간 태초의 사건으로 설명하고 끝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본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인간의 최종 목적에 대해 하느님께서 어떤 작정을 하셨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이 되는 데는 정말로 아주 길고 오랜 역사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인간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해방에서 비로소 그 목적에 도달합니다.
때문에 성경은 여자의 창조 이야기를 하느님의 새 창조라는 맥락에서, 교회라는 맥락에서 읽으라고 촉구합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한층 깊은 예언자적 의미로 다가옵니다. 곧 교회가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새 하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초기 교회의 신학자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십자가 사건과 결부시킵니다. 그러니 서로 함께함이라는 선물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인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창세기 2장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시킬 때만, 비로소 그 한없는 신비가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너’를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타자를 향한 이 관계의 성취가 단순히 자연적으로, 또는 순전히 생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행복한 조합과 자연스러운 재능으로 성공적인 부부 관계에 도달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두고 교회가 이야기의 매듭을 풀어갈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아주 현실적입니다. 교회는 인간에게는 협력자가 필요함을 잘 압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교회 자체가 바로 그 협력자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함께하는 연대가 바로 그 협력자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독신자도 풍요롭고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공적인 혼인 생활도 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는 이혼한 사람도 혼자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늘나라를 위한 혼인도,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도 가능합니다. 교회가 ‘새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힘
이 모든 것이 교회가 영웅들과 반신(半神)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영국 출신의 독일 언론인인 알란 포제너(Alan Posener)가 2002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엄청난 힘은 무엇보다 그 주역들이 그처럼 허약한 존재였음을 숨기지 않는 데에 있다. 여기서는 초인(超人)이 주인공이 아니다. 가장 깊은 내부에서조차 배신과 부인, 매수와 죽음의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대담함을 가진 세계 종교는 달리 없다. 그 어떤 종교도 그처럼 단단하고 대범하게 인간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는 물론 유다교의 유산이다. …이 선택된 민족처럼 자신의 거룩한 경전들에서 스스로를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자신의 임금들을 철저하게 해부하며, 자신의 영웅들을 그처럼 인간적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민족도 달리 없다. …이 민족의 역사에서는 비열함과 배신 자체가 구원의 도구가 된다.”
‘구원의 도구’라니요! 그의 이런 표현을 본당의 기혼자나 미혼자들에게 써도 될까요? 거기 수없이 많은 상처와 약점들이 있습니다. 거기 수없이 많은 실패와 채워지지 않는 푸른 꿈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우리 꿈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목표로 이미 늘 마음에 두신 것, 곧 하느님 백성을 도구로 삼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바로 그것을 위해 말입니다. 성경은 이 목표를 ‘하느님 나라’라고 일컫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온 힘을 다해 이 목표를 이루려 노력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곧 혼인은 다시 거룩한 것이 됩니다. 낯선 사이가 된 배우자들은 서로를 새롭게 발견하고, 자녀들은 다시 부모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섭니다. 아니 적어도 외로운 이는 위로를 받고, 갈라진 처지도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의 품위도 새롭게 회복됩니다.
저는 창세기 2장의 이야기가 다 지난 과거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갈빗대를 붙들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함께함을 위해 힘을 쏟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교회라는 새 가족을 붙들고 여전히 일을 하십니다. 교회는 여전히 길 위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아직도 끊임없이 쉬지 않고 세상을 향해 창조의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당신의 협력자가 되라고!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8년 10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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