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요한 묵시록 함께 읽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요한 묵시록 입문 및 1장 1-8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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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12-19 | 조회수7,991 | 추천수0 | |
[요한 묵시록 함께 읽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요한 묵시록 입문 및 1장 1-8절
입문
요한계 문헌(요한 복음서,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 요한 묵시록)은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가?’, ‘어떻게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따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을 제시합니다. 교회 전승은 요한계 문헌의 저자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사도 요한이라고 전합니다.(요한 21,24 참조)
그동안 우리는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간’을 함께 읽어 왔습니다. 이제 ‘요한 묵시록’을 읽어 가려고 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다양한 환시와 상징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비유적 언어와 표현을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본 맥락에서 벗어나 그릇되게 해석하는 이단과 사이비 종교들에 의해 수많은 종교적·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신앙인에게도 해당합니다
성경, 특히 요한 묵시록은 구약과 신약의 주요 메시지(성부 · 성자 ·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 정의와 자비의 사랑이신 하느님, 구원의 도구인 교회 공동체 등)를 염두에 두고 성경 전반의 큰 흐름과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믿음에 기초하여 읽어야 합니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 요한은 이 글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라고 밝힙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말년, 곧 95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 묵시록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를 편지 형태로 써 보낸 ‘예언’이자 ‘묵시’입니다. 머리말(1,1-8)과 맺음말(22,6-21)을 제외하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곱 교회(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의 신자들에게 편지 형태로 선포하는 ‘예언’(1,9-3,22)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 종말에 대한 환시 · 심판 · 새 세상에 대한 환시를 전하는 ‘묵시’(4,1-22,5) 부분입니다. ‘예언’은 구원을 받기 위한 회개를 강조하고, ‘묵시’는 선과 악 사이의 최후 결전과 심판을 강조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황제를 신격화하던 로마 제국에서 황제 숭배 의식을 더욱 강요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81-96년)를 거부하여 박해를 받던 신자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 굳건한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고자 기술되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당시의 일곱 교회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에게도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삶을 희망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참행복에 다다르는 나침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머리말(1,1-3)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들을 보내시어 요한에게 알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신비에 관한 계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계시’라는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인 요한은 그리스도의 천사를 통해 전해 받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서로 같은 것입니다.(1,9; 6,9; 20,4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증언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공동체 모임이나 전례 안에서 낭독하는 사람과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이 행복 선언은 묵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행복 선언(1,3; 14,13; 16,15; 19,9; 20,6; 22,7.14) 가운데 첫 번째 선언입니다.
요한은 이제 말씀을 낭독하고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그때가 다가왔다고 선언합니다. ‘그때’는 ‘구원의 때’인 동시에 ‘심판의 때’로서 환난을 동반합니다.(1,9 참조) 종말의 시간, ‘그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36-37)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4)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박해 받는 상황에서 교회 공동체는 그때가 오기를 절박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9,1)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인사(1,4-8)
이 인사는 일곱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2,1-3,22)의 도입으로, 공동체의 모임이나 전례 안에서 말씀을 낭독하는 사람과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칭송하기 위해 서로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은총과 평화의 인사(1,4-5ㄱ), 영광송(1,5ㄴ-6), 그리고 두 가지 예언(1,7-8)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은총과 평화의 인사(1,4-5ㄱ)는 요한이 일곱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능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비는 축복의 인사말입니다. 요한은 은총과 평화의 원천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일러 줍니다. 그 첫 번째 원천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 곧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두 번째 원천은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 성령이십니다. 마지막 원천은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은총과 평화’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서간에서 사용한 인사말인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인사말이 되었으며(베드 1·2서 참조), 요한도 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이라고 일컬으면서,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흐름을 따르지 않고 ‘현재-과거-미래’의 순서로 말한 것은 하느님의 현재적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계시는 분’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밝히신 당신의 이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현재-과거-미래’의 구세사를 주관하시고, 영원하시며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곧 인간의 역사 전체를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4절의 “아시아”는 로마의 한 속주로서,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의 서쪽 지역을 말합니다.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의 일곱 교회는 당시 요한이 활동하던 지역의 모든 지역 공동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곱 교회 외에 트로아스(2코린 2,12), 콜로새(콜로 1,2), 히에라폴리스(콜로 4,13) 등의 교회도 아시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묵시록에서 55번 등장하는 ‘일곱’이라는 숫자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정하신 완성, 전체성, 충만함을 상징하는 완전수로, 교회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요한은 일곱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일곱교회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인 교회의 영원한 특성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지상의 모임인 “일곱 황금 등잔대”(1,20; 2,1)일 뿐 아니라 천상의 모임인 “일곱 교회의 천사들”(1,20)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부활, 그리고 현재의 신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시면서 성실한 증인으로 사셨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죽음의 첫 번째 승리자가 되셨으며, 지금은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인사(1,5ㄴ-8)는 그리스도께 대한 공동체의 찬미 노래입니다. 이 부분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4,30)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라고 전하면서, 이 모습을 그분을 찌른 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들이 볼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는 다니엘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과 즈카르야서 ‘찔려 죽은 이를 위한 애도’에 관한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다니 7,13) “그들은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즈카 12,10) 다니엘서에서는 ‘바다’를 혼돈과 무질서를 드러내는 악의 영역으로, ‘하늘’을 하느님의 영역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서에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한 임금님’(즈카 9,9-10)과 ‘선한 목자’(즈카 11,4-17;13,7-9)의 모습과 더불어 ‘찔려 죽은 이’의 모습을 장차 나타날 메시아의 모습으로 제시합니다.
요한은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이라고 노래합니다. 이 구절은 ‘예. 아멘.’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히브리어 ‘아멘.’이 ‘예.’와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앞의 내용을 이중으로 강하게 확인하며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알파(Α)와 오메가(Ω)는 각각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느님께 적용되는 칭호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임금님,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와 “내 말을 들어라, 야곱아 나의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아. 내가 바로 그분이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이사 48,12)와 같습니다. 그러나 묵시록의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칭호이기도 합니다. “처음이며 마지막”(1,17; 2,8),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21,6; 22,13)이라고 표현하면서, 요한은 하느님의 영원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칭호를 예수 그리스도께 부여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 참고 문헌 : 《거룩한 독서를 위한 요한 묵시록 주해》, 《신약 성경 개론》,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초대교회》, 《오늘 읽는 요한 묵시록》, 《요한계 문헌》, 《주석 성경》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18년 12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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