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행전 이야기12: 공동체가 하느님께 기도하다(사도 4,23-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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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4-17 | 조회수6,005 | 추천수0 | |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2) 공동체가 하느님께 기도하다(사도 4,23-31) 주님 말씀 담대히 전하도록 마음 모아 기도하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는 최고의회의 위협에 사도들과 동료들은 하느님 말씀을 담대히 전하도록 해달라고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기도한다. 사도행전의 이 대목은 알제리에서 희생된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의 삶을 그린 영화 ‘신과 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은 ‘신과 인간’의 한 장면. [CNS 자료 사진]
최고의회 위협 전한 베드로와 요한
최고의회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가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자기들에게 한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4,23) 수석 사제와 원로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한 말은 무엇이었던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이었습니다.(4,18)
이 말에 동료들은 “한마음이 되어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뢰었다”(4,24ㄱ)고 루카는 기록합니다. 하느님께 아뢰었다는 것은 기도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함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최고의회 의원인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스승인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주도했던 인물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으니 상황이 위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금지 명령은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분부(루카 24,46-48 참조)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최고의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4,20) 하고 용기 있게 말했지만, 최고의회에서 있었던 일을 두 사도에게 들은 동료들은 두렵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마음이 되어 목소리를 높여 기도한 것입니다.
동료들이란 누구를 가리킬까요? 우선은 사도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야 가장 확실한 동료들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또한 사도들처럼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순절 첫 성령 강림 때 함께 있었던 그 사람들 말입니다. 이들 또한 사도들의 동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도들’로 통칭하겠습니다.
이제 사도들이 바친 기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먼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주님” 또는 “하느님”으로 그치지 않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함께 표현합니다. “주님,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십니다.”(4,24ㄴ) 이렇게 하느님을 표현하는 수식어와 함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유다인들의 전형적인 기도 방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루카 10,21) 하고 기도하셨지요.
이렇게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 다음에 사도들은 하느님의 업적을 기립니다. 여기서는 시편 2장 1-2절을 인용해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음을 노래합니다. 먼저 시편을 인용합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이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 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모였구나.”(4,25ㄴ-26) 그런 다음에 이 시편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과연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는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분, 곧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을 없애려고, 다른 민족들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이 도성에 모여, 그렇게 되도록 주님의 손과 주님의 뜻으로 예정하신 일들을 다 실행하였습니다.”(4,27-28) 여기서 시편의 “기름부음 받은 이”는 예수님께, 시편의 “민족들과 겨레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다른 민족들을, 그리고 시편의 세상 임금들과 군주들은 헤로데와 빌라도에 각각 적용됩니다.
굴복하지 않고 함께 기도한 사도들
이렇게 하느님을 부르고 하느님의 위업을 말씀드린 후 사도들은 이제 실제적인 청원을 합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4, 29ㄱ)라는 표현은 동료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위협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음을 헤아리게 해줍니다. 하지만 사도들의 청원 내용은 위협을 없애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위협에 굴복하지 말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4,29ㄴ) 하고 청합니다.
사도들은 이 기도에서 자기들을 “주님의 종들”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예수님에 대해서는 “주님의 거룩한 종”(4,27)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셨듯이, 자기들도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처럼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해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4,30) 하고 청합니다. 병자의 치유, 표징과 이적들은 사도들이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데 따른 결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이런 치유와 표징과 이적은 사도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청원의 핵심은 위협에 굴복하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기도를 마치자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합니다.(4,31) 이것은 바로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사도들이 바치는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4,31) 최고의회의 위협에 상황이 위중함을 느낀 사도들과 동료들은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고는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도들과 동료들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했고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180년 전 이맘 때에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우리 신앙 선조들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도 기도로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성령에 힘입어 끝까지 신앙의 증인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996년 알제리에서 희생된 트라피스트회 수도자들의 삶을 그린 영화 ‘신과 인간’이 생각납니다.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온 수도자들은 마을을 떠나라는 반군들의 위협이 점점 심해지면서 극한적인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만 처절한 기도와 토론 끝에 모두 마을에 남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반군들에게 끌려가고 몇 달 후 주검으로 발견됩니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8일 모두 복자로 선포됐지요.
우리는 사도들처럼, 순교 선조들처럼, 또는 알제리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처럼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어려움 속에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증인이 되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십자성호를 긋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분이 있습니다. 신앙의 가르침과 내가 마주하는 현실이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7일, 이창훈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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