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행전 이야기21: 교회가 박해를 받다(사도 8,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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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6-22 | 조회수6,727 | 추천수1 | |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1) 교회가 박해를 받다 (1) (사도 8,1-3) 예루살렘 교회 박해, 신자들이 지방으로 흩어지다
- 스테파노의 순교를 시작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인들의 박해를 받기 시작하고 사도들을 제외한 신자들은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진다. 사진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스테파노의 문으로 가는 거리 모습. 사자문이라고도 부르는 스테파노 문은 스테파노가 이 성문 밖에서 돌로 맞아 죽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스테파노의 죽음은 관점에 따라 정반대 의미를 지닙니다. 열성적인 유다인 관점에서 보면 스테파노는 율법을 무시할 뿐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 돌로 사형에 처해야 마땅한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에서 보면 스테파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은 첫 순교자였습니다. 최고의회를 비롯해 열성적인 유다인들에게는 스테파노의 처형이 예수를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믿는 이들에 대한 공격의 신호탄으로 작용했습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의 신자 공동체에는 스테파노의 순교가 본격적인 박해의 시작이 됐습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다(8,1-3)
스테파노가 순교한 바로 그 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고 루카는 전합니다.(8,1) 박해가 닥쳤을 때 그 박해를 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선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사도들의 복음 선포 활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성령 강림이 이뤄진 도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박해가 시작됐다고 해서 예루살렘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사도들이 비록 변방 갈릴래아 출신의 촌뜨기이기는 했지만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지니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이유였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큰 박해가 시작됐다고 하지만, 박해는 히브리계 그리스도인들보다는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을 표적으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의 설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계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율법이나 성전을 덜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열성적인 유다인들에게 더 미움을 샀다고 할 수 있지요. 이 또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는 사도들만 남은 것이 아니라 율법에 충실한 독실한 유다인이면서도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가 된 이들도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 루카는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8,2)고 하는데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스테파노를 장사 지낸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시신을 거두어 자기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처럼(루카 23,50-53) 스테파노와 신자 공동체에 호감을 갖고 있던 말 그대로 “독실한” 유다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 현장에서 마치 증인처럼 지켜보았던 사울이 박해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8,3)고 루카는 기록합니다.
알아보기
여기서 사울에 대해 좀 더 알아봅니다. 그는 소아시아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습니다.(22,3) 타르수스는 오늘날 터키 남부에 있는 도시입니다. 당시 타르수스는 킬리키아 지방의 수도로 중심 도시였습니다. 사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벤야민 지파 사람이고,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필리 3,5)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22,3-4) 가말리엘은 예루살렘 최고의회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온 백성에 존경받는 율법교사였습니다. 최고의회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붙잡아 죽이려고 했을 때 나서서 무마시킨 바로 그 바리사이였습니다.(5,33-39)
사울은 그 자신이 직접 고백했듯이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고…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22,3) 그래서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자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6) 한마디로 그는 유다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엄격한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습니다.(26,5)
게다가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듯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가장 많이 부딪친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타하셨고, 바리사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모욕하고 질타하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음모를 꾸밉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사울은 예수를 선포하면서 최고의회 의원들을 질타하고 특히 성전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듯한(7,48-50 참조) 스테파노의 설교가 대단히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테파노를 돌로 치기 위해 겉옷을 벗어 자기 발치에 두었을 때 스테파노는 거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합니다.
그 사울이 스테파노의 죽음을 계기로 교회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수석 사제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집집마다 들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끌어내 감옥에 넘겼습니다. 최고의회의 법에 따라 이들을 처형 여부를 결정할 때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26,10)
생각해봅시다
1.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그 인근에까지 전파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더 걸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박해는 신자들을 흩어지게 했고, 흩어진 신자들은 곳곳을 다니며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8장 4절 이하에서는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에 의해 말씀이 어떻게 전해지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는 오히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전파되는 전환점이 됐음을 사도행전의 저자는 8장 1-3절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 이야기를 통해 제시하려고 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전환점에서 사울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울에 대해서는 계속 더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2. 살아가면서 우리는 몇 차례 삶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그런데 삶의 방향을 바꾸고 가치관을 새롭게 하는 전환점이 되는 상황은 대부분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말하자면 환난과 시련을 겪을 때입니다. 환난과 시련은 박해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시련의 고비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성장하고 성숙하거나 추락하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을 박해한 사울은 나중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위해 이런 글을 썼습니다. 특히 시련 중에서 이 글을 깊이 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6월 23일, 이창훈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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