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생활 속의 성경: 침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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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2-09 | 조회수6,425 | 추천수0 | |
[생활 속의 성경] 침실 (1)
네 번째로 살펴볼 집안의 장소는 침실이다. 지금 성인이 된 당신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자신만의 방을 갖게 된 그 순간부터 누군가와 함께 방을 쓰기 전까지 침실은, 현재의 자기 모습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를 바로 곁에서 지켜봤기에, 겪어온 즐거움과 고통, 노력과 생각 그리고 꿈을 함께 한 산 증인이 된다.
인간 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기초 공동체인 부부의 성립은 각기 다른 침실에서 다른 성장 과정을 거친 두 사람이 자유롭게 서로의 마음을 합하여 하나의 침실을 쓰면서부터 시작된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는 하나의 침실은, 자신을 드러내고 ‘나’와 ‘너’가 만나 이름을 주고받으며 친교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거룩하고 거짓 없는 ‘알몸의 행위’를 거쳐, 완벽하게 ‘타자’와 내가 일치를 이루는 전례의 장소가 된다. 두 사람이 일치를 이룬다는 침실의 의미는 신랑인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신부인 교회의 삶과 맞닿아 있다. 침실은 하루의 시작인 아침에 ‘희망’으로 가득 차 눈을 뜨고, 밤에는 온전한 ‘사랑’을 위해 침대에 이르며, 함께 한 이와 겹쳐진 팔 사이에 거리낌 없는 ‘믿음’만을 남겨두는 공간이다. 따라서 침실은 사랑하는 이와 사랑하는 이 사이에 주고 받는 삶의 충만함이 드러나는 곳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인간과 친교를 이루기 위해 직접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삶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가정의 기초인 부부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 침실이라면 그 침실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구는 침대이다. 혼인을 맺은 부부의 침대는 생명의 모든 신비를 받아들이고 풀어내는 것을 본다. 다시 말해, 그곳은 함께 잠들고, 생명을 낳으며, 어린 자녀가 방을 가지기 전까지 성장시키게 되는 곳이다. 또 영적 유산을 전해주는 곳이자(창세 47-49 참조) 종종 죽음의 시간을 맞이하는 곳이기도 하다.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바로 이 침실에서 시작한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에게 하신 것처럼(마태 8,14 참조), 혹은 죽음의 시달림에서 승리를 거둔 부활의 큰 선물처럼 표현된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그녀의 침실에서 다시 살게 했다(1열왕 17,17~22 참조). 그리고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가 했던 이 일을 수남 여인의 아들에게 똑같이 행했다(2열왕 4,8-37 참조).
이렇듯 침실은 성장한 두 사람이 서로 만나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생명을 창조하고 또 보살피는 큰 상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와 보살핌은 서로 간의 충실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았을 때는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의미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창조하신 세상을 ‘끊임없이’ 보살피신다는 하느님의 충실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종종 과거 어떤 선택을 내릴 때 그 선택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그 선택으로 인해 포기한 것을 지금 맛보려는 충실하지 못한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것은 선택한 것들의 가치가 익숙해져 아무런 감흥이 없는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호소는 끊임없이 수행해온 자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에 깨어 있으라는 초대이다. 충실함은 이렇게 자기 한계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 보완하는 성숙함을 기르고 자신이 과거에 내렸던 선택을 다시금 확신하는 능력으로 이끌어 인간에게 끊임없이 충실하신 하느님의 그 온전한 모습에 조금씩 접근하게 한다. [2020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생활 속의 성경] 침실 (2)
주보 ‘숲정이’(2487호)에서 침실은 사랑하는 이가 서로에게 충실한 장소이자 생명과 보살핌의 자리가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번 지면에서는 이러한 요인들을 엿볼 수 있는 성경 본문들을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에게 충실함의 표징은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는 표현은 “나는 너와 항상 함께 있는 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바꿔 말해 이 표현의 초점은 “하느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렇게 하느님은 마치 부부의 계약을 맺은 이들이 집 안에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계속해서 부부의 상태로 있게 되듯이 인류와 언제나 변함없이 함께하신다. 이와 같은 성경 저자들의 하느님 체험은 부부 사랑의 징표 안에서, 혼인 예식의 징표 안에서, 여자와 남자 사이의 일치 안에서 나타나는 ‘친밀함’과 ‘부드러움’으로 묘사된다(이사 1,21; 에제 16; 호세 1,3 참조). 인간의 동반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인류와 맺은 계약에 영원히 진실하시고 충실하신 분이시며 인간을 향해 항상 말을 거시면서 그분의 부드러움과 자비를 인간에게 베풀고자 하신다. 침실의 내밀한 사랑을 체험한 한 성경 저자는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기에 이른다. “그분의 믿음은 하늘처럼 굳건하다.”(시편 89,1-3 참조)
그러나 늘 한결같으신 하느님에 비해 인간은 완전하지 못한 존재다. 오늘 사랑했지만, 내일은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을 지녔다. 이런 경향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도록 만든다.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 피곤한 상황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아 하고,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들과 비참하게 만드는 것들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 자신이 그 무엇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 사랑을 계산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이미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잃은 것이고, 누군가 사랑 안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면 사랑은 그 사람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사랑’이나 ‘은총’(chèsed, 헤세드)이라는 말은 시편에서 127번이나 나온다. 이 단어의 뜻을 언제나 문맥에 맞게 구분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이 단어가 ‘은총’, ‘좋으심’, ‘충실함’, ‘자비’, ‘사랑’과 같이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는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과 관련하여 ‘상호 간의 충실함’, 곧 ‘두 사람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믿음’이라는 해석이 적절하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충실함을 드러내시는 태도는 사랑의 진실함, 신뢰, 미덕, 은총, 자애, 견고함이다. 하느님 자신은 이스라엘과 계약으로 연결되어 계시면서, 그분의 선함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백성이 하느님께 죄를 지어 그분을 거부하였을 때, 하느님의 사랑은 법률적 판결을 멈추시면서 당신 사랑의 더 깊은 모습을 드러내셨다. 또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는 사랑, 배신에 더 강하고 죄에 더 강한 은총을 보여주셨다. 결과적으로 한계를 지닌 인간의 계약은 하느님의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사랑 덕분으로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과 항상 함께 있는 이’이자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이’와 함께 역사를 써나간다. 이 역사 안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실망과 좌절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통스럽지만 회개와 용서의 눈물이 담겨 있을 수도, 비참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랑과 감사의 눈물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부부의 침실은 각자의 침실을 쓰다 한 침실을 쓰게 된 두 사람의 역사를 목격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나눈 사라지지 않을 내밀한 세월의 산 증인이 된다. [2020년 5월 31일 성령 강림 대축일(청소년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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