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서의 해: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응답 – 시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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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2-09 | 조회수7,679 | 추천수0 | |
[2020 사목교서 ‘성서의 해 II’ 특집]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응답 – 시편 (1)
마카베오기 하권을 끝으로 창조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마무리됩니다. 물론, 예언서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언급하겠지만, 성경속 다른 장르를 만나보려 합니다. 그것은 바로 150개의 개별 시편들로 구성된 시편집입니다. 시편은 미사 전례 안에서 화답송으로 낭송되기에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하지만, 그 분량이 150편이나 되기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음이 사실입니다.
시편의 어원은 히브리어의 ‘미즈모르’라는 단어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현악기에 맞춰서 부르는 서창’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즈모르를 그리스어 성경에서 ‘프살모스’라고 번역하여 사용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알파벳 언어권에서 사용되는 Psalm의 어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시편은 원래 악기와 함께 낭송되는 음악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유다인들은 이러한 개별 시편들의 모음집을 ‘세페르 테힐림’이라고 부릅니다. ‘세페르’는 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테힐림’은 찬양, 기쁨, 찬송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로 찬양의, 기쁨의, 찬송의 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편집에는 총 150편의 시편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 왜 150이라는 숫자였을까요? 시편 119,164에는 “하루에도 일곱 번 당신을 찬양하니 당신의 의로운 법규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루에 일곱 번, 그렇게 한 주간을 보내면 7X7=49입니다. 여기에 한 주간이 돌고난 여덟째 날에 한 편을 추가하면 49+1로 바로 50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한 50에 완전 수 3을 곱하면 150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냥 우연에 의한 숫자 150이 아니라 철저하게 기획되고 의도된 숫자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제 시편집의 구성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처음 등장하는 시편 1-2은 시편집 전체의 출입문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150편에 이르는 대서사시를 시작해 줍니다. 이와 반대로 마지막에 위치한 시편 146-150은 시편집 전체를 마무리하여주는 시편입니다. 찬미와 찬송의 마무리이기에 마지막 다섯 편의 시편들은 “할렐루야”(야훼 하느님을 찬양하여라!)를 외치면서 마무리됩니다. 이제 남은 건 시편집 전체의 본론에 해당하는 시편 3-145입니다. 시편 3-145의 구성을 시편집의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도 표시가 남겨져 있습니다. 시편 41,14; 72,18; 89,53; 106,48의 구절을 읽어봅니다.
▶ 시편 41,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영원에서 영원까지! 아멘, 아멘!”
▶ 시편 72,18: “주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리라. 그분 홀로 기적들을 일으키신다. 그분의 영광스러우신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시리라. 그분의 영광은 온 누리에 가득하리라. 아멘, 아멘!”
▶ 시편 89,53: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아멘, 아멘!”
▶ 시편 106,4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영원에서 영원까지. 온 백성은 말하리라, ‘아멘!’ 할렐루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찬미와 찬송, 아멘이라는 공통된 외침이 담긴 ‘마침 영광송’을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침 영광송에 의해서 시편 3-145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집니다: 시편 3-41; 42-72; 73-89; 90-106; 107-145(시편 145에서는 마침 영광송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편 146-150, 다섯 편의 시편이 할렐루야 시편이기 때문에 ‘마침 영광송’과 ‘아멘’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왜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시편집을 구성하였을까요? 유다인들에게 다섯 이라는 숫자는 매우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토라(오경)의 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성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토라에 대한 응답이라는 그들의 신학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이스라엘 백성. 그들의 찬미와 찬양의 출발점은 바로 하느님 계시인 토라에 대한 온 백성의 응답이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응답을 드리고 있나요? 시편 기도로 이제 우리의 응답으로 만들어 봅시다. [2020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인천주보 3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2020 사목교서 ‘성서의 해 II’ 특집]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응답 – 시편 (2)
우리는 미사 가운데 낭송되는 화답송을 통해서 시편을 쉽게 접합니다. 하지만, 시편을 부분적으로 만나게 되니, 하나의 시편이 담고 있는 전체의 의미를 읽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시편은 비록 시 형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한 편의 개별 시편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하나의 문학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편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이해’, ‘문학적 이해’, ‘신학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접근을 시편 3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우선 시편 3편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편 3편은 1절의 [시편. 다윗. 그가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서 달아날 때] 라는 머리글로 시작됩니다. 1절의 머리글은 시편이 담고 있는 역사적 배경을 알려줍니다. 이 내용은 2열왕 15-17에서 나옵니다. 다윗 임금의 아들인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의 왕좌를 찬탈하려고 할 때, 다윗은 도망자 신세로 전락합니다. 바로 그때 부른 노래가 시편 3편입니다. 열왕기 하권의 내용을 읽고 시편 3을 읽는다면 좀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바로 ‘역사적 이해’의 측면입니다.
시편 3편 2절에서 다윗 임금은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저를 괴롭히는 자들이 어찌 이리 많습니까? 저를 거슬러 일어나는 자들이 많기도 합니다.” 시편은 하나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기도자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또 자신의 기도와 외침, 탄식의 수신자를 어떻게 부르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문학적 이해’를 위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2절에 담긴 호칭을 살펴봅니다. 시편의 기도자인 다윗 임금은 자신의 기도의 수신자를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은 ‘저’라는 1인칭 단수를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편은 지금 자신의 아들에게 쫓겨서 달아나는 다윗 임금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주님’, ‘당신’(4절)이라고 부릅니다. 다윗 임금 혼자서 외치는 탄식이 아니라, 하느님을 외침의 수신자로 두고 있는 하느님과 다윗 임금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 추가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 임금을 괴롭히는 이들’, ‘다윗 임금을 거슬러 일어나는 많은 자들’이 그들입니다. 이렇게 등장인물이 정리되면, 내용을 살펴봅니다.
2-3절에서는 다윗을 괴롭히는 저항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 임금을 두고 빈정대는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 다윗 임금은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를 에워싼 방패, 저의 영광, 저의 머리를 들어 올려 주시는 분이십니다.”(4절). 그러한 고백에 다윗은 하느님께 신뢰를 표현합니다. 하느님께 부르짖으면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하느님께서 받쳐 주시기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렵지 않다는 강한 신뢰를 표현합니다(5-7절). 그리고 그는 외칩니다. 하느님께 ‘일어나시라고, 자신을 구하여 달라고’ 외치면서, 주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기도를 마무리합니다(8-9절).
원수들의 괴롭힘 →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고백과 신뢰의 표현 → 신뢰를 담은 기도로 마무리가 됩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아홉 절의 짧은 시편 안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아들이 자신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다윗이 의지할 곳은 하느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는 하느님을 ‘저를 에워싼 방패’, ‘저의 머리를 들어 올려 주시는 분’(4절), ‘부르짖으면 응답하시는 분’(5절), ‘나를 받쳐 주시는 분’(6절), ‘구원이신 분’(7절)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시편 이해를 위한 마지막 요소인, ‘신학적 이해’가 놓여 집니다. 다윗의 그 절박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의 괴로움과 고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들에게 위협을 받았던 그의 아픔을 우리가 이 시편 안에서 읽어낼 수 없다면, 우리는 다윗의 이 기도를 옳게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절박함을 읽어내 봅니다.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 나를 거슬러 일어난 많은 사람들. 그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요? 다윗 임금처럼 ‘나의 방패’,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나요? 그러한 고백이 쉽지 않다면, ‘저를 괴롭히는 사람이 어찌 이리 많나요?’, ‘저를 빈정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느님께 외쳐보십시오. 다윗의 외침과 만나는 우리의 절규는 하느님의 구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 시편이 주는 선물입니다. [2020년 3월 1일 사순 제1주일 인천주보 3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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