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흥미진진 성경읽기: 자상하고 친절하신 낚시오빠 예수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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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2-10 | 조회수6,826 | 추천수0 | |
[양승국 신부의 흥미진진 성경읽기] 자상하고 친절하신 낚시오빠 예수님
‘성당오빠’ ‘교회오빠’란 말이 있습니다. 그게 실제로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단정하고 예의바르며, 상냥하고 신앙심까지 깊은 청년, 그래서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는 뭇 여동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오빠를 말합니다. 주일학교 교리교사나 성가대 활동도 열심히 하지만, 마음이 따뜻해 여동생들의 고민도 잘 들어줍니다. 또래 청년들처럼 술·담배에 찌들지 않은 훈남인데다, 기타며 드럼까지 잘 다루니, 주변 남자들로부터 ‘공공의 적’ 취급을 받기 일쑤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 낚시가 국민적 취미 활동으로 떠오르면서 ‘낚시오빠’란 신조어도 생겼습니다. 낚시 관련 프로에 자주 등장하는 한 멋진 모델 겸 배우를 봤습니다. 일단 낚시 실력이 수준급입니다. 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척척 대물을 잡아냅니다. 캐스팅이며 챔질하는 모습도 멋집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잡은 고기를 별일 아니라는 듯 쓱쓱 손질해서 회까지 멋지게 떠냅니다. 매운탕이며 찜이며 요리실력도 탁월합니다. 키도 훤칠하게 크고 잘 생겼습니다. 뭐하나 빠지는 게 없습니다. 전형적인 낚시오빠입니다.
저 같은 경우 완벽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낚시오빠’ 근처까지 간 것 같습니다. 초보 형제들을 위해서는 자상하게 채비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미끼까지 끼워줍니다. 잡았을 때 탄성을 지르고 좋아하지만, 정작 바늘에서 고기를 빼는 일도 제 몫, 다시 미끼를 갈아주는 것도 제 몫입니다. 허탕치고 있는 형제들을 위해서는 포인트며 수심까지 가르쳐줍니다. 잡은 고기는 현장에서 즉석회를 뜹니다. 오로지 잡는 데만 혈안이 된 초보들을 위해 배달 서비스까지 해줍니다. 철수할 때는 쓰레기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나 안드레아 사도처럼 전문직 어부 출신이 아님에도, 요한 복음서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특급 낚시오빠 분위기입니다.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아 허탈해하는 제자들에게 고기들이 모여 있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어주십니다. 밤샘일에 허기가 진 제자들을 위해 생선을 손질하십니다. 소금간까지 맞춰 맛깔스럽게 구워놓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성당오빠, 낚시오빠보다도 더 자상하고 친절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스승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발현 등 일련의 사건으로 머릿속이 뒤숭숭하던 어느 밤, 베드로를 포함해서 일곱 제자는 고기를 잡으러 밤배를 탔습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베드로가 먼저 일어서자 다른 제자들도 따라나섰습니다. “우리도 함께 가겠소.” 내동댕이쳤던 그물을 다시 손에 들고 힘없이 고깃배에 오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스승님 부재시의 참담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고기라도 좀 잡으면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을까 싶어 밤새 애를 써봤지만, 그 밤따라 완전 꽝이었습니다. 울적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호숫가로 나오는데, 먼동이 터왔습니다. 육지에 가까이 도달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그 꼭두새벽 호숫가, 저 멀리에 누군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그분이 스승님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뜸 질문 하나가 날아왔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다 보면 꼭 그런 사람 있습니다. 제발 그냥 좀 지나가주면 좋겠는데, 꼭 물어봅니다. “많이 잡으셨어요?” “뭐 좀 잡히나요?” 어떤 분은 더 사람을 난감하게 만듭니다. 잡은 고기를 가둬놓은 망까지 들어 쳐다봅니다. 큰 놈으로 몇 마리 건진 날은 어깨가 으쓱하지만, 피라미 새끼 한 마리 못 건진 날은 창피하기도 하고, 그러는 사람들 보면 은근히 화까지 납니다. 제자들 심정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밤새 티베리아스 호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단 한 마리 못 잡았습니다. 말을 건넬 힘도 없어 다들 묵묵히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저 멀리서 누군가 손나팔을 모아 외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제자들 심기는 더 불편해졌겠지요. “젠장, 불난데 부채질이야 뭐야? 저 사람은 왜 신새벽부터 나타나서 남의 속을 긁는 거야, 도대체 저 양반 뭐 하는 사람이지?” 그러나 제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애써 억누르며 대답합니다. “못 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포인트를 딱 잡아주시면서 조언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제자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습니다. ‘저 사람이 지금 누굴 놀리나? 우리는 이 바닥에서만 경력이 30년인 전문직 어부들이야!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어 정말!’ 그러나 포스와 위엄이 잔뜩 느껴지는 그분의 말씀에 압도된 제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거짓말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이 터져나갈 정도였습니다. 그제야 눈치 빠른 요한 사도가 알아차렸습니다. 베드로에게 보고를 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잡힌 물고기는 총 153마리였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에 따르면 고대 자연과학자들은 세상 모든 물고기 종류를 153가지라고 여겼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그물 안으로 총집합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표가 그물 속에 든 153마리의 고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힌 물고기를 몇 마리 갖고 오라 하시고는 손수 숯불을 피우셔서 노릇노릇 맛있게 구우시고, 빵도 꺼내놓고는 외치십니다. “와서 아침을 들라.”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자상하고 따뜻한 성당오빠, 낚시오빠 인증입니다. 참담한 실패의 밤을 보낸 허기진 제자들 앞에 빵과 물고기를 대령하시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날 새벽 티베리아스 호숫가 제자들의 마음은 착잡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 후, 제자들은 삶의 의미요 기둥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야간작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매운탕이라도 끓여놓고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 텐데, 그날따라 단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뭘 해도 안 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비참하기도 해서, 큰 상심에 빠져 있던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스승님의 부재상태에서 임재상태로 상황이 전환되자 우울했던 제자단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던 밤 바다는 어두웠던 실패의 밤이었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부재 사이 차이는 엄청납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우리 공동체 안에 부재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절망과 낙담, 우울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현존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기쁨과 희망, 따스함과 풍요로움, 강한 생명력과 낙천성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손수 맛갈지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실패의 밤을 지새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다정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껏 고수해온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망상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새로운 그물을 펼칠 때 놀라운 사랑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 양승국 - 살레시오회 소속 수도사제. 저서로 『축복의 달인』 『친절한 기도레슨』 『성모님과 함께라면 실패는 없다』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등이 있다.
[생활성서, 2020년 2월호, 양승국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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