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행전 이야기63: 로마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다(사도 27,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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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5-11 | 조회수7,807 | 추천수1 | |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63) 로마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다(사도 27,1-20) 거센 풍랑으로 절망에 빠진 바오로 일행
- 바오로는 카이사리아를 출발해 배편으로 로마를 향하지만, 그가 탄 배는 크레타 섬 남쪽에서 폭풍을 만나 며칠 동안 표류하다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그림은 바오로의 로마 여행 경로의 일부. 출처=「주석성경」
바오로가 카이사리아를 떠나 배를 타고 로마로 갑니다. 하지만 도중에 폭풍을 만나 배에 탄 사람들 모두 엄청난 어려움을 겪습니다. 살아날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로마로 출발하다(27,1-12)
마침내 로마로 가기로 결정돼 바오로는 다른 수인들과 함께 ‘황제 부대’의 율리우스라는 백인대장에게 넘겨집니다.(27,1) 사도행전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바오로를 로마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관할권자인 페스투스 총독이었을 것입니다. 바오로가 황제에게 상소한 데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저자는 여기서 “우리가 로마로 가기로 결정되자”라고 복수 1인칭을 사용합니다. 이 복수 1인칭은 바오로가 로마에 들어간 것을 전하는 28장 16절까지 계속됩니다. 사도행전에는 여기만이 아니라 다른 대목(16,10-17; 20,5-15; 21,1-18)에서도 “우리”라는 복수 1인칭이 사용되고 있지요. 이 대목들은 모두 여행 기록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사도행전 저자가 일종의 ‘여행일지’를 자료로 받아서 정리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현장감을 더하기 위한 문학적 기교의 하나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가 ‘우리’라고 표현한 바오로의 일행 중에는 테살로니카 출신인 아리스타르코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바오로가 3차 선교 여행 중 에페소에서 지낼 때 동행한 인물입니다.(19,29; 20,4) 바오로 일행은 아시아 속주 곧 오늘날 터키 서쪽 지방의 여러 항구로 가는 아드라미티움 배를 타고 출발합니다. 아드라미티움은 아시아 속주의 위쪽 지방인 미시아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배는 다음 날 카이사리아 북쪽 지중해 항구인 시돈에 닿았고 백인대장은 바오로에게 인정을 베풀어 “바오로가 친구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보살핌을 받도록 허락합니다.”(27,2-3) 바오로의 친구들이란 시돈의 그리스도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배는 시돈을 출발하지만, 역풍을 피하고자 키프로스 섬 동쪽 해안을 타고 소아시아 곧 오늘날 터키의 남쪽 지방들인 킬리키아와 팜필리아 앞바다를 가로질러 리키아 지방의 미라에 이릅니다.(27,4-5) 당시 지중해 동쪽 팔레스티나 연안에서 소아시아 서쪽의 에게해 연안 도시들로 가려면 키프로스 섬 남쪽 바다를 거쳐서 가는 것이 거리상으로는 가깝습니다.
하지만 늦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이 해역에 강한 서풍이 불어서 이 뱃길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역풍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바오로 일행은 역풍을 피해 키프로스 섬 동쪽 해안을 타고 터키 남부와 키프로스 섬 사이를 항해해 미라까지 간 것입니다. 미라는 로마 제국의 곡창지대 역할을 하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곡물을 싣고 이탈리아로 가는 배들이 중간에 들르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백인대장은 이곳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에 바오로 일행을 태웁니다. 배는 이탈리아 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지만, 맞바람인 서풍이 불어서 여러 날 동안 더디게 항해하다가 간신히 소아시아 속주 서남쪽 끝의 크니도스 항구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맞바람 때문에 서쪽으로는 더 이상 가지 못한 채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크레타 섬 북동쪽에 있는 살모네를 거쳐 섬 남쪽의 ‘좋은 항구들’이라는 곳에 닿습니다.(27,6-8)
그 사이에 많은 시일이 흐릅니다. 단식일도 지나고 항해하기가 위험해지자 바오로가 나서서 “이대로 항해하면 짐과 배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위험하고 큰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27,9-10) 단식일은 유다인들이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지키는 ‘속죄일’을 가리킵니다. 이 속죄일 이후에는 바람이 거세고 파고가 심해 배편으로 여행하는 것이 위험해져서 이듬해 2~3월까지 뱃사람들은 사실상 항해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이 점을 경고한 것입니다.
배의 실제 지휘권자인 백인대장은 바오로의 말보다 선주와 항해사의 말을 더 신뢰했지만(27,11) ‘좋은 항구들’이란 곳이 이름과는 달리 겨울을 나기에 좋지 않은 항구여서 섬 서쪽 끝 항구인 페닉스까지 가서 겨울을 나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페닉스는 남서쪽과 북서쪽 바다를 다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27,11-12)
계속된 폭풍으로 희망을 잃다
마침 남풍이 부드럽게 불었습니다. 배는 닻을 올리고 크레타 해안에 바짝 붙어서 서쪽으로 항해합니다.(27,14) 해안에서 떨어지면 북풍에 그만큼 배가 더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에우라킬론’이라는 폭풍이 크레타 섬에서부터 몰아칩니다.(27,15) 이 폭풍은 크레타 섬의 이다 산맥에서 부는 거센 바람을 가리키는데, 작은 배들이 이 바람에 휩쓸리면 전복되거나 멀리 아프리카 해안까지 떠밀려 간다고 합니다.
바오로가 탄 배 역시 이 바람에 휩쓸립니다. 배 뒤에 달고 다니던 보조선을 배 위로 끌어올리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카우다’라는 작은 섬을 지나면서 바람이 가려진 틈을 타 간신히 보조선을 끌어올립니다. 그러나 폭풍에 배가 멀리 밀려가지 않도록 닻을 내린 채 떠밀려 다닙니다.(27,16-17) 북아프리카 리비아 앞바다에는 사르티스라는 곳이 있는데, 위험한 모래톱이 있어 배가 좌초되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이를 두려워해 닻을 내린 채 폭풍에 배를 내맡긴 것입니다.
그러나 폭풍이 계속되자 선원들은 이튿날 짐을 일부 바다에 던져 버립니다.(27,18) 배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이탈리아까지 가는 큰 배여서 배 안에는 이집트에서 실은 곡물들을 비롯해 이탈리아로 보내는 여러 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짐을 다 버릴 만큼 폭풍이 거세게 계속됐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안 되자 사흘째 되는 날 선원들은 배에 딸린 도구들마저 자기들 손으로 직접 바다에 내던져 버립니다.(27,19)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던 것입니다.
여러 날 동안 폭풍에 시달렸는데도 해는 별로 보이지 않고 바람만 거세게 불어댑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마침내 우리가 살아날 희망이 아주 사라져 버렸다”고 표현합니다.(27,20)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처절한지를 드러내 주는 표현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바오로는 이미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하면서 바다 여행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래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는 이렇게 쓰기도 했습니다. “나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했습니다.”(2코린 11,25)
그렇다면 바오로는 바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항해를 계속하는 것의 위험성을 직감했고, 그래서 수인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나서서 경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묵살당했고 그로 인해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듯이 보이는 사람의 말도 경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더 잘 안다고,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때로는 더욱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4,9) 하신 예수님 말씀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10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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