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성서의 해: 루카 복음서 - 소외된 이들을 위한 복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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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07-20 | 조회수8,463 | 추천수0 | |
[2020년 사목교서 ‘성서의 해Ⅱ’ 특집] 루카 복음서 - 소외된 이들을 위한 복음서
루카 복음서의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고향 나자렛의 한 회당에서 이사 61,1-2의 말씀을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 말씀은 앞으로 펼쳐질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활 여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소외된 이들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실 그분은 초라한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실 때부터, 그리고 보잘것없는 목자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실 때부터 그러한 의향을 드러내셨습니다(루카 2,6-20). 루카 복음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가난한 이들, 죄인들, 여인들, 사마리아인들과 같이 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루카의 행복선언(6,20-23)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루카 저자는 마태오 복음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보다 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마태오 저자가 “가난”에 대해서 보다 윤리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면, 루카의 예수님은 실제로 가난과 굶주림에 놓인 이들의 행복을 노래하고 바로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이야기는 현세에서 누리는 부와 재산이 내세의 구원을 절대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동시에,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선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죄인들” 또한 예수님의 구원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루카는 당대에 죄인으로 여겨지던 “세리”가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를 전하는데요, 특히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이야기(18,9-14), 그리고 자캐오 세관장의 이야기(19,1-10)는 율법을 지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낮추고 회개할 줄 아는 죄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19,9)이 된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루카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15,11-32)는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간절히 바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로 루카 복음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비교적 존중을 받지 못했던 “여자들”이 루카 복음에서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고(1-2장의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이야기), 또 유다인들에게 배척을 당하던 “사마리아인”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도 눈에 띕니다(9,51-56; 10,29-37; 17,11-19).
이처럼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외면당하는 사람들이 루카 복음서의 전면에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기존에 세워진 사회적 가치와 질서를 전복시키고,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사회 질서를 극적으로 뒤바꾸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루카 복음서에 등장하는 부유한 이들, 고관들, 상류계층에 속하는 엘리트들은 세상이 주는 안정과 풍족함을 누리며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나라를 거부합니다. 세상이 건네는 위로에 만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 즉 가난한 이, 죄인, 병자, 세리, 여성, 사마리아인들은 더 쉽게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그분 나라의 몫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들이야말로 온전히 그분께 의탁할 수 있음을 루카 복음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도 세상이 주는 풍요로움 속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참된 행복의 선물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이 주는 위로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4).
[2020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인천주보 3면, 정천 사도 요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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