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안티오키아 -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다 | |||
---|---|---|---|---|
이전글 | [성경] 정경으로서의 성경: 나와 너, 우리의 이야기 | |||
다음글 | [구약] 하느님 뭐라꼬얘?: 너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바쳐라! |2|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10-02 | 조회수6,644 | 추천수0 | |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안티오키아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다
– 안티오키아 전경. 터키에서는 안티기아라고 부른다.(BiblePlace.com)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신자들은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그리고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안티오키아에 교회가 세워지면서 그곳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사도 11, 19.26).
시곗바늘을 잠시 거꾸로 돌립니다. 예루살렘 최고 의회에서 스테파노가 한 설교를 듣고 흥분한 유다인들은 마침내 스테파노를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입니다. 이 일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의 발단이 됐습니다. 사도들을 제외한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져 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사도 7, 54―8, 4).
하지만 흩어진 신자들이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에만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 지방을 넘어서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합니다”(사도 11, 19). 페니키아는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와 레바논의 지중해 연안 지역입니다. 키프로스는 지중해의 섬이고, 안티오키아는 페니키아 북쪽 시리아 땅의 큰 도시였습니다.
– 안티오키아 외항 역할을 한 셀레우키아 항구 유적(BiblePlace.com)
흩어진 신자들이 이들 지역으로 가서 “유다인에게만 말씀을 전한” 것은 신자들이 아직 유다교의 율법과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방인들과 접촉하고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율법을 거스르는 부정한 행위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환시를 보고 말한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바로 비유다인들, 곧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두고 속되다고 하지 마라’는 말씀을 듣고 이방인인 코르넬리우스 집안에 세례를 베풀지요. 지난 호에서 살펴봤듯이 이 사건은 복음이 이방인에게 선포되는 신호탄이 됐습니다만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고, 신자들은 아직도 유다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들 지역에서 말씀을 전한 신자들 가운데는 히브리계 유다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키프로스와 키레네 사람들, 곧 그리스계 유다인들도 있었습니다(사도 6,1 참조). 이 그리스계 유다인 신자들은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 곧 그리스계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사도 11,20). 이들이 이방인들인 그리스계 사람들과 접촉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히브리계 신자들보다 율법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에서는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군사적 요충지며, 동서가 만나는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
오론테스강을 끼고 있는 안티오키아는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 내륙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와 구별해서 오론테스의 안티오키아 또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라고도 불렀습니다. 당시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 도시로 꼽히는 큰 도시였습니다. 로마인들의 동방 진출의 교두보로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을 뿐 아니라 동서가 만나는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인 국제적인 대도시였습니다.
– 1900년대 초반의 안티오키아 오론테스강(BiblePlace.com)
이런 큰 도시에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소문이 500km 가까이 떨어진 예루살렘까지 전해집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키프로스 출신으로 교회 초기부터 활동한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에 보내 사정을 파악하게 합니다.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확인하고는 더욱 굳은 믿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히 하라고 격려합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르나바의 영향으로 신자들이 더욱 불어납니다(사도 11, 22-24).
바르나바는 그 뒤에 타르수스로 가서 사울을 찾아 안티오키아로 데리고 옵니다. 날로 커가는 안티오키아 교회를 위해서는 사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사울과 함께 1년 동안 안티오키아 신자들을 만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칩니다. 이 안티오키아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믿는 이들, 신자들, ‘나자렛 분파’ 사람들, ‘새 길’을 따르는 이들이라고 불리다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사도 11, 25-26). 안티오키아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됐다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새로운 종교로 사람들 사이에 인식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후 그리스도교의 성장과 확산에 큰 역할을 합니다. 유다 지방을 덮친 큰 기근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을 겪자 구호금을 모아 보내고(사도 11, 29-30),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견합니다(사도 13, 1-3). 바오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선교 여행도 모두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합니다(사도 15, 36-40; 18, 22-23).
– 안티오키아에 있는 베드로 사도 기념 동굴 성당(BiblePlace.com)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거점 도시 안티오키아
이민족 신자들의 율법 준수 문제와 관련,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가 열리도록 한 곳도 안티오키아 교회였습니다.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안티오키아에 내려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해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분쟁과 논란이 벌어집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티오키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도움을 청했고,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 회의를 열어 이방인 신자들 곧 그리스계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 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불륜 이 네 가지를 멀리하면 된다고 결정함으로써 복음이 이방인 세계에 널리 전파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됐습니다(사도 15장).
첫 번째 보편 공의회인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서열상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 총대교구로 선포될 정도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안티오키아에는 한때 20여 개 소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교회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시내 중심가에서 2km 남짓 떨어진 곳에 베드로 사도를 기념하는 동굴 성당만이 남아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의 집회 장소였고 베드로 사도가 이곳에서 설교하고 가르친 것을 기념해 지은 성당이라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4~5세기부터 성당으로 사용됐고, 현재 모습은 십자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베드로 사도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베드로 사도를 정면으로 반박했던 일화를 전합니다(갈라 2, 11-14).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47~54년에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신자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초대 주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시리아가 아닌 터키 남부의 국경 도시로 존속하고 있는 안티오키아는 단체 여행을 하는 일반 성지순례객들은 잘 찾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도시, 팔레스티나 땅을 넘어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거점 도시로서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잊을 수 없는 성경의 도시, 역사의 도시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0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