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하느님 뭐라꼬얘?: 너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바쳐라!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신약] 성서의 해: 테살로니카 1·2서 - 종말을 준비하는 빛의 자녀 |2|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10-02 | 조회수6,909 | 추천수0 | |
[하느님 뭐라꼬얘?] 너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바쳐라!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
창세기 22장 ‘이사악의 희생제사’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끔찍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하느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받으시다니요? ‘사람을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는 관습’은 셈족이나 인도-유럽족과 같은 고대인들이 (신적인 보호를 빌기 위해) 행하곤 했던 종교적 의식의 하나였습니다. 아브라함 당시 이교 가나안족들의 경우 갓난아기들을 죽여서 새로 짓는 건물의 토대에 묻곤 했었는데, 열왕기 전서 16,34 “히엘은 예리코의 기초를 놓다가 맏아들 아비람을 잃더니, 성문을 달다가는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다.”는 언급에서, 그리고 열왕기 후서 16,2 “그(아하즈 임금)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역겨운 짓을 따라, 자기 아들마저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였다.”는 언급에서도 ‘아이를 죽여 바치는 제사’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과 함께 판관기 11장의 판관 입타가 자신의 딸을 바쳤다는 이야기도 ‘사람을 죽여 바치는 제사’의 관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입타는 암몬의 자식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그곳의 원로들에 의해서 지휘관으로 추대되어 주님의 영을 받아 전장에 나가게 되는데, 그때 주님께 이렇게 서원하였지요.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31절) 주님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사를 지내겠다는 약속을 주님께 드린 것이지요. 과연 입타는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싸움에 승리한 입타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글쎄 (다른 아들 없이) 하나뿐인 딸이 (그것도 자기를 맞으로 기뻐 춤을 추며) 나오는 것 아닙니까! 입타는 결과적으로 주님께 자신의 딸을 죽여 바치겠다고 약속한 몹쓸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입타는 (딸의 소원을 들어 두 달의 말미를 준 후에) 주님께 서원한대로 (남자를 안 일이 없었던) 딸을 바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은 이스라엘에서도 이교도 땅에서처럼 (아마도 기원전 6세기경까지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관습이 있었던 것 아닐까하는 추론하게 합니다. 이렇게 이사악의 희생제사 이야기는 당시 행해지던 관습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신 하느님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언급한 것처럼 ‘그토록 사랑하는 외아들’을 바쳐야 했던, ‘이사악’이란 이름 그대로 자신에게 ‘전정한 웃음을 가져다 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바쳐야 했던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해 결코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이었겠지만 묵묵히 번제물(곧 자신의 아들)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곳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에게 장작을 지우고서 (장작을 진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칠) 칼과 불을 손에 든 채 사흘 동안이나 먼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즐거운 여행길이 아니라 아들을 잃고 홀로 돌아와야만 할, 그야말로 고통과 상심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아브라함이 겪었을 아픔은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7절) 라는 아들의 물음으로 극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죽을힘으로 슬픔을 억누른 채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8절)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일까요? 어쩌면 아브라함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생각만으로 꽉차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가득 찬 아브라함이 한 말은 미구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일에 대한 예언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들을 묶어 장작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를 보고 당황해하는 아들에게 아브라함은 그 어떤 말도 (양해를 구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통의 신음 속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으며 아들의 시선을 외면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참으로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12절) 절망의 순간에 안도의 숨을 쉬게 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고, 이에 그는 그 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제물을 마련해 주신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죽여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행동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사악의 희생제사 이야기는 결국 하느님께서 그만두게 하신 ‘인간의 잘못된 관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즉 잘못된 인간 관습에 대해 ‘하느님께서 하신 단죄의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께 대한 사람의 경외심’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아무리 소중한 것을 요구하신다고 해도 그것을 드림에 아까워하지 않는 자세, 그분께 대한 전적인 믿음으로 끝까지 순종하는 자세, 한마디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실한 응답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사람대신 짐승을 바침으로써 첫아들의 목숨이 속량되어야 한다는 율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메시지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목숨을 건 여행길을 떠났던 아브라함은 이제 ‘사랑하는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쳐라’ 하시는 하느님의 동의할 수 없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결국 순명하였습니다. 교부들에 의하면, 노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외아들을 바쳤다는 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어놓으심’에 대한 예표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극심한 시험을 통해서 완성되고 드러났듯이 우리의 믿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어떠한 시험도 겪지 않는 신앙은 있을 수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시련과 십자가의 길을 통해 깊어가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당신의 약속과 다른 것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종국엔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이루어 주실 것이라 믿고 늘 순명하며 살아갑시다!
야곱과 에사우, 이스라엘과 에돔
창세기 25장의 후반부에 다음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사악이 나이 마흔에 라반의 누이인 레베카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이사악이 레베카를 위해)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21절) (이사악의 나이 예순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어 임신을 하게 된 레베카는 (아기들이 배 속에서 서로 부딪쳐 대자) 주님께 문의를 했고, 이에 주님께서는 “너의 배 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두 겨레가 네 몸에서 나와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26,23)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야곱은 쌍둥이 형인 에사우와 투쟁하고, 외삼촌 라반과 투쟁하며, 그 아들들에 이르러서는 세겜 사람들과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선둥이가 나왔는데 살갗이 붉고 온 몸이 털투성이라, 그의 이름을 에사우라 하였다. 이어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있어,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다.”(25,25-26)
여기서 ‘야곱’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이라는 뜻이지만 발뒤꿈치를 뜻하는 ‘야켑’과 ‘속이다’라는 뜻의 ‘야캅’과 관련된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사우가 “이제 저를 두 번이나 속였으니, 야곱이라는 그 녀석의 이름이 딱 맞지 않습니까? 저번에는 저의 맏아들 권리를 가로채더니, 보십시오, 이번에는 제가 받을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28,36) 라고 한 것이지요.
“이 아이들이 자라서, 에사우는 솜씨 좋은 사냥꾼 곧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살았다.”(25,27) 창세기 저자는 야곱과 에사우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며, 후일에 벌어지는 이스라엘과 에돔의 역사를 풀이하는 듯 보이는데, 그 근거로 볼 수 있는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을 때 에사우가 허기진 채 들에서 돌아와서 야곱에게 했다는 말입니다. “‘허기지구나. 저 붉은 것, 그 붉은 것 좀 먹게 해 다오.’하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 하였다.”(25,30) ‘에사우’라는 이름이 ‘털투성이’를 뜻하는 히브리말 ‘세아르’와 그가 장차 살게 될 산악지방인 ‘세이르’와 연관이 있어 보이고, 이 에사우가 ‘붉다’를 뜻하는 ‘에돔인’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과 에돔 두 민족은 왜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곧잘 서로 싸움을 벌이는 사이가 되었을까요? 창세기의 저자는 그 둘이 원래는 한 민족이었는데, 과거에 있었던 안 좋은 일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창세기에서 인간적인 술수로 하느님의 축복을 얻은 사람인 듯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과 축복은 인간의 재주와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자유로운 뜻에 달렸다는 것이 성경의 변함없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창세기가 그리는 야곱은 비록 완전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 변함없는 믿음을 두고 일생 충성스럽게 하느님을 믿고 섬겨온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일생은 하느님께 얼마나 충실한 가운데 펼쳐지고 있습니까?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0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