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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신약 성경 다시 읽기: 나 죽을 때… - 티모테오 2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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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16 조회수7,318 추천수0

[신약 성경 다시 읽기] 나 죽을 때… - 티모테오 2서

 

 

공자의 말을 담아놓은 『논어』에서 누군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삶을 모른다면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 그리스도교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고,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라 고백합니다.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삶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와 같아야 한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신약 성경, 특히 바오로의 서간을 읽을 때마다 꽤나 당황스러운 것은 죽음과 생명, 선과 악, 고통과 기쁨 같은 대립과 반목이 뚜렷한 단어들이 그 긴장의 힘을 모조리 잃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도무지 하나될 수 없는 단어들이 버젓이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묻고 따지고 갈라놓은 채 서로의 대립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민낯을 부끄러이 드러냅니다. 죽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노화를 막아서려는 서글픈 아집이나 슬픔과 고통의 자리를 애써 피하고자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날만을 꿈꾸는 집착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박해 속에서 은총을 구하는 신앙의 논리와는 사뭇 다르다 못해 낯설기 짝이 없는 날것 그대로 일상을 어지럽힙니다.

 

티모테오 2서에 나타난 바오로는 수인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4,6-8) 바오로가 맞이한 생의 끝은 그리 따뜻하지 못했습니다. 바오로는 홀로 자신을 변호했고(4,16) 모두가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되뇝니다.(1,15) 바오로에게 생의 끝은 고독, 그것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오로는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의 자리에 디모테오를 초대합니다.(1,8; 4,9.21) 사랑하는 아들로, 용맹한 군사로, 공동체의 힘있는 증거자로 디모테오가 자신의 고난에 함께하기를 바랍니다.(2,1-3;3,10-117; 4,1-2.6-8.9-22)

 

대개 삶을 정리할 시간이 되면 제 스스로 걸어 온 삶에 대한 후회와 미련, 그로 인해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한 교훈적 말을 몇 마디라도 남기고 싶을 테지요. ‘너는 그러지마라.’, ‘너는 나보다 멋진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저 역시 제 삶의 끝에 내뱉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봅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달랐습니다. 바오로는 자신만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의 삶은 부활하신 주님과 그 주님을 따르는 신앙 공동체를 제 몸과 제 삶의 조각으로 기워 입었습니다. 바오로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미 부활한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제껏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영원한 생명을 다시 한번 부여잡는 희망의 순간이었습니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의 처지가 신앙을 증거하는 최고의 자리로 이해하는 바오로에게서 죽어가는 이의 회한이나 절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바오로는 생명에 대한 설렘을 전하고자 합니다.(2,11-12)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작으로, 디모테오를 통해 또 다른 교회의 봉사자와 증거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활의 선포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제 삶을 신앙을 증거하는 데 봉헌한다면 바오로의 삶이, 그를 따른 수많은 신앙인의 삶이,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누군가의 삶에서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바오로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면서까지 함께하는 삶이 곧 생명의 삶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티모테오 2서 1장 8절에 사용된 “쉰카코파테오(συγκακοπαθ ω)”라는 동사를 우리말 성경은 “고난에 동참하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카코파테오”라는 말에 “함께”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쉰(συν)”을 붙여서 만든 말입니다. 바오로는 “함께”를 강조합니다. 고난에 함께하길 원했고(2,3) 죽음도 함께, 삶도 함께, 다스림도 함께하길 원했습니다.(2,11.12) 그의 삶이 “함께”를 드러냈고, 그의 죽음이 여전히 “함께”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맞이할 생의 끝이 수인의 단절이라도 ‘그럼에도’ 바오로는 ‘함께’를 이어가고자 티모테오를 부르고 있습니다.

 

‘함께’에 대한 강조는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로도 이어집니다. 이른바 ‘거짓 교사들’을 바오로는 강하게 질타합니다.(2,14.16-18.26;3,1-9) 거짓 교사들은 헛된 논쟁과 망언을 일삼는 무리였습니다(1티모 6,20; 티토 3,9). 티모테오 2서 2장 16절에 나타나는 그리스말 ‘케노포니아’를 우리말 성경은 망언이라 번역했는데, 본디 뜻은 ‘의미없이 비어있는 말’을 가리킵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진리의 말씀을 전하길 바랍니다.(1,6-8; 2,1-7.15.22-25) 거짓 교사들의 망언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데 반해 진리의 말은 꽉 차있습니다. 너무나 꽉 차 있어 하나의 개념으로, 하나의 명제로 규정되거나 정리될 수 없는 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망언은 제 신념과 사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반면, 진리의 말씀은 늘 묻고 또 물으면서 끊임없이 제 삶의 품위를 다듬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1티모 2,2)

 

예전 유학시절,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서툰 시간을 꾸역꾸역 살아낼 즈음, 먼저 공부하고 계셨던 선배 신부님을 만나 주저리주저리 푸념을 늘어 놓으며 소주잔을 기울인 날이 있었습니다. 서양말에는 명사가 남성, 여성형으로 구분되는데, 고독이란 프랑스말은 ‘솔리뛰드(solitude)’로 여성형입니다. 선배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외롭거든, 방 안에 아주 까탈스런 여자 하나 있다고 생각해라! ‘솔리뛰드’라는 여자말이다!” 프랑스 샹송 중에 “라 솔리뛰드(고독)”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의 고독과 함께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네.”

 

삶의 끝에서 공동체와 함께하고자 한 바오로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워서 모두가 의로움의 화관을 얻어 누리길 바랍니다.(4,8) 우린 혼자가 아닙니다. 우린 함께 달리고 함께 싸우며 진리를 지켜내는 사람들입니다. 함께여서 감사합니다.

 

[월간빛, 2020년 11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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